(행 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 22: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행 22: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종종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정반대로 더 나빠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과거보다 부분적으로 일순간 더 좋게 변할 수 있는지는 모르나 내면적인 인간성이나 가치관까지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나이를 먹어가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악해져만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어느 사람이 내면적으로 영적으로 전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의 축복을 경험한 증인들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베드로,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나도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며,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앞서간 종들의 공통점이 바로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변화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를 받으며, 변화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 변화되어지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변화 받아야 하는 이유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얼마나 무의미할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보람된 일을 하며 살아갈 때 비록 먹고 입는 것과 상관없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잘알고 있는 평범한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와 같은 상식대로 사는 사람은 적고 몰상식하게 먹고 마시는 것에만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음에도 상식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일 평생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이라면 그 구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값없이 구원받은 것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기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가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을 즐기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믿음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보다 좋은 축복은 더 많이 받기 원하면서 실상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몰상식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내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왜 실제의 삶에서는 그것이 실천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변화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 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점에 맛있는 음식을 먹은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자신 있게 그 음식점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복음이라는 음식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맛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나의 입맛이 변하여 복음의 맛을 느낄 수 있어야만 복음의 감칠맛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그 복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이며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며 기름 부음이 내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쉽게 말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때로는 세례를 받지 못했어도, 교회를 다니지 못했어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좋은 예가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물론 그 강도는 구원은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였나요? 아무것도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구원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영적인 알곡으로 택하셔서 나로 하여금 나를 통해서, 나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해내는 구원의 종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 구원의 도구가 복음이며, 그 구원의 방법이 전도이며, 그 구원의 대상이 만인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문화적인 많은 격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타락한 인간들의 부패한 인간성은 더 선해진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져가고 있다는 점,
2)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경제 수준이 높아져 갈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점,
3)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가련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이천 여 년 전에 예수님은 그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은 자선 사업이나 구제 사업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 전도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보내실 때 부탁하신 것도 자선 사업이나 구제 사업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 전도였습니다.
그 복음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좋은 소식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천년 동안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변화를 받았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 세상 문화가 예수님 당시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세상에서 신체적인 병은 고칠 수 있지만 타락한 본성은 고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복음 외에는 죄인이 구원받고 죽을 자가 다시 사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복음, 복음, 전도, 전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복음을 천사나 기계가 아니라 반드시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을 통해서만 전하게 하시는 전도라는 방법을 고집하고 계십니다.
흔히 사람들이 요즘 같이 문화가 발달된 시대에 구태의연한 전도 방법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나 하면서 전도를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전도라는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예수님에게 삼년간 직접 훈련을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세상으로 가서 만민을 제자로 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 1:8 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은 후에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삼년 동안이나 많은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서 증언할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신 후에 성령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삼으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지극히 다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이 죽고 나면 전도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증인은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부어주셔서 그 성령이 나를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증언하는 것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누구든지 제자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다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질서의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임하든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딴 소리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 사람이 말하듯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그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증인은 얼굴 모습이나 피부색이나 언어나 문화가 다를지라도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은 동일하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믿게 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증인들은 어느 누구든지 동일한 계시 동일한 복음을 동일한 해석을 통해서 증거 하기 때문에 통일성과 점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복음의 증인들은 증거 하는 진리가 다 동일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가장한 사단의 역사는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증거 하지만 전통진리와 벗어난 엉뚱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변화받기 전과 이후
구약 시대에는 회당이 있었고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침 받고 종교적인 훈련을 해왔습니다.
물론 성경을 근거로 하여 가르치기도 합니다. 일정한 과정을 마치게 되면 지도자가 되고 전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몸으로 받은 훈련 과정만으로 목사가 되고 전도사 되고 선교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도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증언이나 아니라 남에게 배우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이해를 도울 뿐이지 내면에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변화되기 전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통 유대교에서 정통 신학을 배우고 율법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의 과정을 거친 엘리트로 유대 사회에서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던 사람이며 그 열정이 반유대교적인 절대로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유대교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가장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냥꾼처럼 닥치는 대로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잡이로 살았음을 오늘 성경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지 못한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좋은 가문과 뛰어난 학문과 높은 지위와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무슨 일에 몰입하며 살았습니까?
바로 사람을 죽이는 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대적하는 일, 교회를 파괴하는 일, 주의 종들을 괴롭히는 일, 복음을 훼방하여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하는 일,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하는 일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바울만 그렇습니까? 만일 내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비록 나름대로 주의 일을 열심히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오히려 사울처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사는 것이 잘못된 삶이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사도 바울도 성령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오히려 복음 증거를 훼방하고 핍박하는 사단의 종으로 쓰임을 받았던 사람임을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사도 바울도 이처럼 변화받기 전에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티끌만큼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거나, 변화를 소원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을까요? 만약 그 비법을 안다면 우리 중에 변화 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1) 주님을 대적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은 일방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두 눈에 시력을 잃을 정도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나타나셨으며, 귀에 분명히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2) 사울은 그 주님 앞에 서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땅에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울의 이름을 거듭 부르시면서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여기서 핍박이라는 말은 계속해서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울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탄압하는 그 일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3) 주님은 바울에게 잘못하고 있는 것만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시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으시고 이제부터 사울이 바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착각하지 않도록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해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행 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만일 주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그러한 체험을 하게 하여 주시지 않았다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전혀 마음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체험이 없이 사울이 개종을 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극적인 체험은 사울을 바울이 되게 하였고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였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간증을 듣고 읽는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이유가 바로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 맞아 죽게 되는 위기 상황을 오히려 동족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알고 발걸음을 멈추어 신앙 간증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열정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행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여기서 변명이라는 말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자기가 그들처럼 열심히 믿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변화의 과정을 핍박자들에게 간증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나 고난이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족을 구원해야 하겠다는 열정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님께 받은 사명은 이방인 선교였지만 평소 바울이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동족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떤 말로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바울 당시의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누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과연 사람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을까요?
그 답이 바로 바울처럼 변화를 받아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 믿기 전의 어두움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빛 된 삶으로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할 수 있는 전도자가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전도자인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을 앞세우고 성령을 의지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또한 바울은 자신은 특별한 사람처럼 늘 성령이 충만하고, 늘 복음 전도의 열정에 사로잡혀 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때로는 자기도 전도하기가 두렵고 싫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전도가 저절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하고 전도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처럼 기회를 찾고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변화를 받은 간증자라고 저절로 전도가 되어지고 항상 전도할 마음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때로는 억지로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전도하기를 힘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와 같은 바울의 마음을 본받아 7월 2일 영혼추수주일에 알곡들을 추수하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