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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한국 무교의 만남
2007-03-29 03:38:28   read : 2498

그리스도교와 한국 무교의 만남

 

김승혜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국 그리스도교의 1세대는 모두 유학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쓴 교리서나 노래 등에는 유학자들이 지녔던 무교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다 무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보면 무당의 굿에 대해 잡귀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당의 굿에서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은 마치 두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굿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모두 천주께 매여 있는지라 잡귀신은 도무지 화복의 권리를 잡지 못하느리라.' 고 하여 천주를 완전히 신뢰하고 잡귀신 내지 굿은 전혀 가까이하지 말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상의「상재상서」에서도 이와 똑같은 입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박수·판수·관상·점쟁이 따위가 부녀자와 어리석은 백성을 곤혹스럽게 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는 것을 예사로 알고….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하상은 무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천주가사」에서도 전통적인 최고신의 개념은 수용하지만 불사佛事나 무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스운가. 사람 살자 한 평생에 무슨 귀신 그리 많소. 허망하다 마귀 귀신 믿지 말고 천주 믿세.' 이런 입장은 개신교가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최병헌이 쓴「성산명경」과「만종일련」등에서도 유교를 비롯한 다른 신앙과 그리스도교와의 대화는 시도하면서 무교만은 부정적인 평가 아래 제외시켰습니다.

러한 개화기의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김동리의「무녀도」입니다. 193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무녀도」는 젊은 작가 김동리를 일약 유명 작가로 만들었으며 예순여섯 살 때 그는「을화」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다시 쓰기도 했습니다.

「무녀도」의 무대는 경주입니다. 경주는 전통 문화의 도시로서 무교의 고향과 같은 것으로 상징됩니다. 주인공은 모화라는 무당과 그의 아들 욱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아들 욱이 평양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그리스도교인이 되어 돌아오면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어 돌아온 욱이는 어머니 모화와 신앙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결국 모화는 아들이 잠든 틈에 성서를 꺼내 태워버립니다. 예수 귀신은 잡신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욱이가 말리면서 벌어진 둘 사이의 몸싸움 중에 욱이는 모화가 들고 있던 칼에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앓아 누워 있던 욱이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데, 죽기 전 그를 만나러 온 서양 선교사에게 욱이는 마을에 교회를 세워줄 것을 부탁합니다. 결국 선교사는 그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은 점점 교회로 모여들게 됩니다. 아들을 잃고 마을 사람들마저 교회로 옮겨가는 상황에서 모화는 물에 빠진 여인의 지노귀굿을 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끊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소설에 대해 김동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녀도는 개신교에 대한 샤머니즘의 패배가 아니다. 인간적 죽음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화의 행동은 인간적 초월의 장엄한 희생이다." 물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합일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 마음 속 신앙의 근원인 무교로의 회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교는 겉으로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살아 남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에서는 무교를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자신들의 전통 안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무교측에서도 불교와는 알력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무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따라서 도전을 받은 무교측에서도 그리스도교와는 대립 의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개화사상과 접목되면서 무교는 전근대적이고 미개한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개화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가 최남선입니다. 그의「조선상식문답 속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미신의 타파이니, 기독교가 유일신 밖에 모든 우상을 배척하여 미신이 들어오면 뿌리째 뽑아 정신적 해방을 이룬다.' 또한 그는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세 가지로 들었는데 첫째는 병자에 대한 과학적 치료이고, 둘째는 빈민과 고아에 대한 보호이며, 셋째는 악령 신앙과 미신의 감퇴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개화사상으로서 무교를 전면적으로 배격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렇다면 현대 그리스도교와 무교의 관계는 어떠하며, 어떠해야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먼저 무당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기 위해 오늘날의 대표적 무당이라 할 수 있는 김금화씨의「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무교에서 서양 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늘에도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우리 무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가 보다.' 그러면서 김금화씨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당했던 곤혹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리스도교인 20여 명이 나타나 자신을 둘러싸고는 '마귀가 들렸다.' 라며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계속 주위를 돌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자신의 기도를 방해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금화씨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너무들 하는구나. 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에 나오는 신이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그는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느냐고 따져도 보았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자신의 무구巫具 등을 못 쓰게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한 김금화씨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신迷信'이라는 것은 결국 '그릇되게 믿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무교가 그리스도교나 불교처럼 이른바 고등 종교는 아니라 해도, 그것을 진실되게 올바로 신앙한다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삶과 생활은 여러 차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여러 차원이 각기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각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각자만의 독특함과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금화씨의 책을 보면 곳곳에서 진정한 무당으로서의 자신의 자각과 신념 그리고 고뇌가 피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 자신과 똑같은 한 사람의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교에 대해 막연히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인상과는 달리 무교를 신앙으로 살고 있는 진정한 무당에게는 다른 종교인과 다름없는 체험과 느낌, 고뇌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경청'이라는 자세를 먼저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교의 입장을 듣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내면에서 깊이있게 되새겨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이나 신앙의 차원과 연결시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작업을 통해 끝에 가서는 무교와 그 사제司祭인 무당들을 살아 있는 나름대로의 종교 체험을 지니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우리 사회 안에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에 두고 있는 마지막 문제는 무교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무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날 실제로 그리스도교 안에도 상당 부분 흡수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무교적인 요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를 곰곰히 함께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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