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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받으신 예수님
2007-03-16 05:48:46   read : 1946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받으신 예수님

마가복음 10장 35-45절(마 20:20-28)
유상현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알곡교회)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열두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하여 첫 번째로 말씀하셨고(눅9:22-27, 마16:21-28, 막8:31-9:1), 두 번째는 갈릴리에서 말씀하셨으며(눅9:43-45, 마17:22-23, 막9:30-32). 그리고 세 번째인 본문은 고난의 현장으로 올라가시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받으실 고난의 내용을 여리고로 향하던 요단강 근처에서 말씀하셨습니다(눅18:31-34, 마20:17-19, 막10:32-34). 마지막으로 감람산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과 유월절에 당할 자신의 체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마26:2).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사람 빌라도와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주겠으며, 그들이 예수님을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여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예고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사건이 돌발적 사건이 아니고 계획적이고, 목적적이며,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누가 크냐?”하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요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0:20). 그러니까 세 모자(母子)가 합심하여 예수님께 청했던 것입니다. 이일로 인하여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을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과 그 일로 분을 내는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의 말씀을 제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이 높은 자리에 앉는 큰 사람, 존귀한 사람,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고픈 우리들도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분깃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35절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보다는“자신들의”만족을 위하여,“자신들이”구하는 모든 것들을,“자기들이”얻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휘두르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칭송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시며,“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잔”과“세례”란 무엇입니까?
여기서“잔”이란‘괴로움’과‘수난’을 상징하고(시75:8, 사51:17),“세례”란‘넘치는 괴로움’과‘고난’을 상징하는 말입니다(시18:16, 69:1-2).
이 두 가지의 표현은 모두 예수님께서 당하실“십자가의 고난의 분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 말씀의 참 뜻은“너희가 내가 짊어질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난의 분깃을 감당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헛된 욕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그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할 수 있나이다.”라고 선뜻 대답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잔”과“세례”를 옥좌의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의해서 얻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9-40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너희가 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세상의 공명과 허영에 들떠 사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남은 분깃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야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no cross no crown”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한다면 기꺼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의 고난의 분깃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8:34).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영광도, 축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난의 분깃을 감당해야 합니다.

2. 섬기는 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41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열 제자들이 일제히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노를 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제자들도 똑같은 세상의 정욕에 흠뻑 젖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저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의정, 좌의정의 높은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높은 권세의 자리를 저 형제들이 그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선수(先手)쳐 버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제히 분을 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크기를 원했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머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앞선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신자가 높은 자리, 큰 자리, 으뜸이 되는 것, 머리가 되는 것, 앞서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명기 28장을 비롯한 여러 성경에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었었다면 그것은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되는 방법과 비결과 첩경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섬기는 자”와“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섬기는 자”란‘집사’(딤전3:8)로 번역했는데 이는‘먼지 속에서 일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종”이란‘주인을 섬기는 노예’라는 뜻입니다(빌1:1).
그것은 복음의 일꾼(섬기는 자)이 되는 것이고(고전3:5, 엡3:5-7),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롬1:1).

미국의 백인(메릴렌드) 선교사님 한분이 브라질에 있는 밀림 속에 들어가서 인디언 들을 상대로 선교하는데 인디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갔을 때 그들은『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백인은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실망주의자입니다. 아주 증오와 모멸의 뜻이 그 백인의 말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료 선교하면서 그들을 잘 도와주니까 나중에 호칭이 바뀌어『존경스런 백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백인은 백인이지만 저 사람은 조금 다르다, 그래서 존경스런 백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한 10년쯤 지났습니다.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그들의 말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백인 인디언』이라 그렇게 불렀습니다. 백인이지만 우리하고 똑 같은 사람이다. 형제로 받아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치료 받으러 온 한 소년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감동을 합니다. 인디언의 발을 씻어주는 백인이 있을 수 있는가? 저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라고하며 그때부터『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때 부터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먼저 섬겨야 됩니다. 먼저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 나라(교회)의 위대함의 기준은“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동안 행복하려거든 여행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거든 집을 사라. 일년 동안 행복하려거든 결혼을 하라. 일평생 행복하려거든 이웃을 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크고자 하는가? 섬기는 자가 되어라. 으뜸이 되고자 하는가? 종이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신“크리스챤 리더쉽(Christian leadership)”과“세속적 리더쉽”의 차이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본문 42절에“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하신 후 43절에“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 리더쉽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을 임의로“주관”하고“권세”를 부리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며 호령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욕심입니다.
인간은 두세 사람만 모이면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 의의(意義)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일체의 불안한 갈등 밑바탕에는 이러한 지배 욕구의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권한이 세냐? 누가 교회의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로 싸우며 다투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눅17:10). 종이 높아야 얼마나 높겠으며, 종끼리 서열을 따져봐야 그 서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철저하게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의 직분을 계급화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제멋대로 사람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크리스챤 리더쉽의 본질은“섬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주관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종”이 되어 사람들을 섬기는 곳에 크리스챤 리더쉽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님을 아십니까? 청십자병원을 세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의술을 베풀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장기려 박사님에게는 훌륭한 믿음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특별히 할머니는 아주 열심 있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 손자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손자 하나님 나라와 현실 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일꾼 되게 해 주세요.”라고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틈 날 때 마다 어린 장기려에게 성경이야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다윗이야기 요셉이야기를 들을 때 어린 장기려의 마음속에 불이 붙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돼야지. 그렇게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고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하나님 합격 시켜주시면 제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공부한 것 나를 위해 쓰지 않고 남을 위해 쓰겠습니다.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대에 합격 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그래서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청십자병원을 개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도와주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경남 거창에 사시는 어떤 환자분이 병원에서 치료를 다 받고 낳았는데 병원비가 모자랍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병원비를 안내니까 퇴원을 안 시켜줍니다. 그래서 하도 답답해서 장기려 박사님을 찾아와서 원장님 제발 집에 좀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꼭 갚겠습니다. 그때 장기려 박사님이“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밤에 내가 문 열어 줄 테니까 살짝 도망치십시오. 자기 병원에서 남의 병원처럼 막 선심을 씁니다. 아이구! 저야 뭐 고맙긴 고맙습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합니까? 병원 방침은 그렇고 지금 농사철인데 빨리 가서 농사지어야지 어떻게 합니까?”하고는 그날 밤에 문을 열어 주니까 농부가“감사 합니다.”하고 갑니다. 그때“이거 얼마 되지 않지만 갈 때 차비로 쓰십시오.”하고 손에 봉투까지 쥐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직원들이 웅성웅성 합니다.“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106호 환자가 도망 쳤습니다.”“괜찮습니다. 내가 문 열어 줬습니다.”“아니 왜요”“다 낳은 환자를 병원에 붙들어 둬서 어떻게 합니까? 빨리 가서 돈 벌어야 될 것 아닙니까? 지금 한참 농사철인데...”
직원들이 하도 어이없어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그는 돈 벌기 위해서 의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을 섬기기위해서 의사 일을 했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된 성도들은 계급의식에서 나오는 지배 욕구를 극복하고“섬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로 살기 원하십니까? 철저하게 섬길 각오를 하십시오.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대접받고, 영광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더욱 낮추시고, 더욱 섬기십시오. 모든 사람보다 더욱 낮아져 철저하게 주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길 때 주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구주의 귀한 인내를 본받아 더욱 낮아지고, 더욱 사랑하며, 더욱 섬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본문 45절에“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섬김의 절정은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최고봉은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여기서“대속물”이란 당시에‘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주는 속전’을 의미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나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한 석방금, 보석금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의 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자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지불하신 것입니다(롬3:23-25, 벧전 2:24).
또한 예수님은“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전세기에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위한 속죄물이 되셨다는 뜻이요, 공간적으로 전 지역에 사는 사람을 위한 속죄물이 되셨다는 뜻이며, 내용적으로 인종이나 국적이나 계급이나 연령이나 성별의 차별이 없이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죽으심이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와 민족과 세대를 초월하여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 그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브라더 로렌스』의 얘기는 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항상 후미진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정식 수도사도 아니고 평신도 수도사로서 있으면서 수도원 부엌에서 항상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정말로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식당에서 정식 수도사들을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그 수도사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항상 흐뭇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부엌이 천국이 되게 하소서!”그처럼 부엌에서 항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으로 지친 수도사들이 이 식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모든 수도사들이 매일 식당에 갈 때마다 그런 감동을 느끼니까 그가 있는 후미진 식당은 그 수도원에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곳의 위치가 특별히 좋아서 신기한 영적 기운이 흐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영혼이 아무도 보지 않는 장소에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심령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나중에 그 카르멜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는 투표가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되었을까요?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브라더 로렌스』가 원장에 뽑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미진 곳에서 헌신하는 사람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람마다 좋은 자리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러나 헌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헌신을 해야 진짜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광중에 높임을 받는 자리가 좋은 자리인 줄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좋은 자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순교자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금세에 백배의 복을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국의 성직자 파머의 글에 이런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 속에 위대함이 숨어 있고, 조용히 행하는 의무 속에 영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작은 공간을 채워 나가는 사람, 작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기쁘게 달려 나가는 사람, 낮은 지위라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오해 왜곡 시기 모략을 받아도 의연히 참아 내는 사람, 마음의 고통이 심해도 이웃의 기쁨을 위해 웃을 줄 아는 사람, 모든 이기심과 야만과 조급함을 구원의 봉사를 위해 몰아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순교자만큼이나 위대한 순교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고난의 십자가의 분깃을 감당하며, 섬기는 종으로서 순교자적 삶을 사는 자에게 현세에 백의 복과 내세에 영생의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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