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6절)
강원도 어느 시골 의원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의사 가운보다는 늘 축구 유니폼을 입고 진료하시는 독특한(?) 분이셨습니다. 이 마을에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의사 선생님에 대한 전설(?)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열이 나면 무조건 해열제를 규정보다 훨씬 많이 투여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배가 아프면 무조건 맹장으로 진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 교회에 다니던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다고 합니다. 좀 참아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배가 너무 아파 견디지 못한 아이는 엄마하고 그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축구복을 입은 의사선생님의 진단은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맹장입니다!” 그것도 급성 맹장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의 다급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바로 수술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수술이라는 말에 겁이 난 아이는 갑자기 “항상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술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를 하는 아이의 마음에 자꾸만 ‘다른 병원으로 가라’ 는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게 ‘다른 병원에 가 보자’고 떼를 썼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아이의 엄마도 워낙 아이가 강하게 떼를 쓰니까 혹시나 싶어서 차를 대절해 먼 곳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가 다시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대학병원에서의 진단은 사뭇 달랐습니다. 맹장이 아니라 장에 변이 꽉 차서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술이 아니라 변을 빼 꺼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관장하고 곧바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병원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진단과 처방을 잘 하는 것입니다. 병의 원인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해 주는 병원, 그래서 결국 치유를 제공해 주는 병원이 바로 좋은 병원입니다. 병원에서는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서비스가 좋다고 하더라도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병원은 머지않아 곧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반드시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육체의 질병에 대해 바르게 진단하고 처방을 해 주는 병원이 좋은 병원인 것처럼, 좋은 교회란 영혼의 문제에 대해 바르게 진단하고 정확하게 처방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는 기독 청년들은 당연히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이러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누구보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은 심하게 아파하며 앓고 있습니다. 사회가 학벌을 중요시하고 학벌이 진로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청년들은 마음대로 원하는 대학을 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게 되지도 않습니다. 아니 직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 톱니바퀴에 끼여 늘 급한 일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도 차분히 하나님 앞에서 머물러 있기보다는 일꾼이 필요한 교회의 현실 때문에 대부분의 열심 있는 청년들은 1인 2역 아니 1인 3역 이상을 감당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기쁨이 사라지고 의무감으로 일을 하다가 지치고 결국 탈진하게 됩니다. 실로 문제는 많은데 답은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상처받은 영혼들, 절망 중에 있는 영혼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문제 투성이의 사람들을 만나 주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을 심어 주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치유되고 회복된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고 치유된 제자들을 통해 1세기의 세상은 더불어 치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주님의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치유 받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이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도 상처받아 힘들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치유는 어떻게 경험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치유를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기적의 사건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첫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사도행전 3장에는 치유가 필요한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의사이자 사도행전의 저자였던 누가는 본문 2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 사람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못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성전 문지방 근처에서 한 푼 두 푼 지나가는 행인들이 던져 주는 동전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꿈도 없었고 비전도 없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이 사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 놓여져 있는 이 못 걷는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진단은저마다 달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의 친족과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의 진단은 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구걸하기 좋은 명당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잘 움직일 수 없는 이 사람을 날마다 메어서 미문이라는 성전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당연히 저녁 때 구걸이 끝나면 다시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겠지요. 어쩌면 이들의 이 진단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이 못 걷는 사람은 명당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이 사람 곁은 수없이 지나가던 행인들의 진단은 물질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므로 내게 있는 물질 가운데 얼마를 나누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이 행인들의 진단도 필요한 진단이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이들의 물질 때문에 삶을 연명해 왔으니까요. 그러나 본문 속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진단은 사뭇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요? 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 베드로의 진단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그냥 보지 않았습니다. ‘눈 여겨’ 봤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봤습니다. 즉 베드로는 못 걷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 명당 자리로 데려다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진단했습니다. 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진단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실로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못 걷는 이에게 있었던 인생 문제에 대한 이 베드로의 정확한 진단은 이 사람에게 치유를 경험토록 하였습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요즘 여러분이 끌어안고 있는 삶의 중요한 문제는 과연 무엇입니까? 요즘 여러분에게는 과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표면적이고 주변적인 문제들 말고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짜 문제들 말입니다.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려면 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아파도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만지심으로 우리는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치유를 경험한 사람만이 또 다른 사람의 문제도 정확히 진단해 줄 수 있고 또 그를 치유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문제를 정확하게 처방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가 처방을 하기 전 진단을 하기 위해 각종 검사를 실시합니다. “어디 아파서 왔나요? 열은 있나요?” 문진하며 청진기를 대 보기도 합니다. 혈압도 재고 필요할 경우에는 소변 검사, 피검사를 하고 X-Ray를 찍고 CT 촬영을 하고 그래도 모르면 MRI 즉 자기 공명 정밀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래서 결국 병에 대한 진단이 나오면 의사는 그 진단에 따라 맞는 처방을 합니다. 만약 진단을 정확하게 했다 하더라도 정작 처방하는 단계에서 잘못 처방을 내린다면 그 환자는 절대로 치유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과 더불어 정확한 처방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 속의 못 걷는 이를 정확하게 진단 내렸던 베드로는 정확한 처방을 내립니다. 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못 걷는 이의 문제를 ‘예수를 모르는 것’이라고 진단했던 베드로는 바로 그 예수를 처방해줍니다. “내게는 은이 없다. 내게는 금도 없다. 그러나 네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다. 다른 것도 아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이 내게는 있다. 그 예수님을 네게 처방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걸어라.”
이렇게 강한 어조로 선포한 베드로는 못 걷는 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성경은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게 되며 걷고 뛰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내린 정확한 처방 때문에 못 걷는 사람이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요즘 여러분은 삶의 문제를 대하며 어떤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까? 문제는 다양합니다. 삶의 갈증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삶의 문제를 처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치유의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그냥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 아플 때 급성 맹장이니까 배 째라고 하는 의사도 있고 화장실 가서 관장하고 똥을 누라고 말하는 의사도 있는 것입니다.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키고 있어야 할 환경은 어떤 것일까요? 6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 “내게 있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제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소유하는 환경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오후 3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큰 소리 쳐놓고 막상 로마 군병이 오자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갔다고 얘기합니다. 하루에 한 번 빠짐없이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그 시간에 베드로는 성전에 가서 주님과 교제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기도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앞에 앉은 못 걷는 이를 만났을 때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었으며 치유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치유를 경험하려면 이와 같은 치유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요즘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하여 치유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그런 치유와 회복을 전해 주는 생명 전사들이 됩시다. 가까이에서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 민족과 북한 땅에 그리고 전 세계 모든 미전도 종족들에게 이러한 치유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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