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설교 운동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인 성경에 근거를 둔 독일과 스위스, 네덜란드를 위시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Reformation) 교리와 영국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칼빈주의 성화의 삶이 함께 만나 17세기 독일에서 이룩한 신앙운동을 교회사는 경건주의(Pietismus)라 일컫는다. 영국 청교도주의가 대륙에 전달된 데에는 청교도 인물들과 경건 서적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는데, 그 중 성도의 실질적 삶을 주제로 한 청교도주의 경건 서적들이 보다 강력한 매체가 되었다. 17세기 당시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서점가에는 자국어로 번역된 영국 청교도주의 경건 서적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청교도주의 경건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물론 루터교회가 다수인 독일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을 근본으로 한 청교도주의 경건 서적에 처음에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과 더불어 교인들의 가정 필독서가 되는 것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청교도주의는 유럽 대륙의 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형성하였는데, 그것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경건 운동으로 정의하는 경건주의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첫째는 죄로 인해 감각 없이 잠들어버린 교회를 성령의 역사로 깨우고 일으키는 영적 부흥 운동(Revival Movement) 또는 각성 운동(Awakening Movement)으로, 둘째는 새롭게 된 심령은 육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와 함께 성경이 원하는 교회를 재형성(Re-Form)하고,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명을 다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 운동(Reform Movement) 또는 갱신 운동(Renewal Movement)으로, 셋째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뭔가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는 새롭게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며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사이에 가까이 하기를 원해, 모든 성도들이 경건 모임을 통해 함께 성경을 읽고 배우며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원했던 전 교우 운동(Lay Movement), 소그룹 운동(Conventicle Movement) 또는 성경 운동(Bible Movement)으로, 마지막으로 심령의 부흥과 각성을 경험한 성령 충만한 설교자들이 먼저 있었으며, 진리의 빛이 넘치며 뜨거운 가슴으로 회개와 거듭남을 열정적으로 외쳤던 영감 넘치는 많은 설교가 행해졌고, 그 설교를 듣고 변화된 삶을 현장에서 우리 주님의 인격으로 실천하며 사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갔던 많은 숨은 크리스천들이 나타났던 설교 운동(Preaching Movement)으로 이해한다.
이 글은 그 가운데 특히 설교 운동 경건주의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방송, 신문, 잡지 등 매스컴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는 설교의 역할이 특히 강력했다. 물론 마이크 시스템이 없었던 시대, 교회가 효과적인 공명을 위해 예배당 건축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음을 우리는 잘 안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 할 때 그리고 하나의 호응으로 연결되지 아니할 때는 사장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대부분의 위대한 지도자와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언변을 가진 자였다. 특히 설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에 지적 수준의 고저가 문제될 수 없었고, 신분의 고하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하여 도서 구입비는 경제적으로 많은 지출을 요구했다. 설교는 이런 면에서 경제적이었고, 언제든지 장소를 옮길 수 있는 기동성과 현장성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과 경제력을 요구하는 글 또는 책과 다르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설교가 갖는 대중성은 곧 수월성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경건주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경건주의자들은 영적이고 보다 힘있는 설교를 통해 교회가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하며, 16세기 종교개혁이 원하는 갱신된 교회로 나아가기를 추구했다. 즉 이 땅에 존재했던 성경의 초대교회를 모델로 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하기를 원했다. 여기서는 특히 경건주의자 1675년 슈페너가 쓴 저서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이하 PD)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설교 운동 경건주의를 이해할 것이다.1)
슈페너의 설교 이해 “설교자의 직분은 교회의 개혁을 위한 모든 일에 최우선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세가 부족할수록 더 큰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목사는 무엇보다도 바르고 참된 성도들을 늘리는 일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한 성도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며, 그 진리를 능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PD 138).
슈페너는 바른 교회를 위해 설교의 갱신을 우선적으로 추구했다. 설교의 형식, 논리, 수사, 횟수가 문제가 아니고, 설교의 방향과 내용 그리고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경건주의는 성도의 내적 경건과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한 위로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가 행해져야 함을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높은 강단에서만 선포되는 설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성경 읽기, 성경 이해와 연구, 그와 더불어 영적 대화를 위한 성도들의 경건 모임도 도입하게 된다. 설교에 모든 것을 거는 목회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모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가능하다면 모든 성도가 정해진 시간에 공식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설명 없이 순서에 따라 한 사람씩 앞에 나와 성경을 소리 높여 낭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때 중간 중간 짤막한 요지를 말해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성경을 잘 보지 못하거나 전혀 읽을 수 없는 성도들 혹은 아직 성경을 소유하지 못한 성도들의 경건을 위해서 매우 유익하다”(PD 118).
게다가 슈페너는 당시 실질적 대안이 없는 채 너무 신학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행해지는 설교도 경계하였다. 설교가 성도들의 현장 삶을 위해 구체적이고 실천적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았다. 특히 정통주의 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17세기 독일교회의 목사들은 설교에 있어서 신학적 지식과 논리, 화려한 수사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의 외적, 공적 고백과 인간 외형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속한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황이나 경건 생활을 고려하지 않게 되고, 목사 자신의 명예를 좇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여기서 경건주의는 보다 다른 영적인 설교를 강조하며 설교자들의 변화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의 신앙과 신앙의 열매들을 가장 잘 맺히게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 중에는 설교의 횟수가 충분하지 않은 곳은 별로 없다. 그러나 지각 있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이 행해지는 설교들 중에서 적지 않은 결함을 발견하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설교들 중에는 학식 있는 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일부 평범한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설교에 너무 많은 원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설교는 어쩌면 참석했던 성도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서론이 매우 세련되고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설교를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중략) 설교가 전해지는 강단은 설교자의 화려한 수사학이 과시되는 곳이 아니라, 순전한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말씀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를 향해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아울러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성도들의 삶과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PD 157).
내적 인간을 겨냥해야 하는 설교 경건주의는 참 믿음이 보여 주는 열매로서 성도의 진정한 삶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외적이고 타인에게 과시하는 윤리적 삶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외적 윤리 및 외적인 열매에만 관심을 쏟게 될 때, 내적 인간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채 이러한 행동이 크리스천의 삶으로서 판단의 근거가 될 때, 이는 한낱 위선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즉 성도의 진정한 삶의 변화는 내면의 변화가 먼저 와서 맺혀지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인간의 내적 변화 없이 외적 행위만의 강조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간파하였다. 또한 새로운 인간을 향하여 설교가 강력한 수단임을 인식하고, 설교자들의 설교가 근원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을 인식했다. 한 마디로 영적이고, 내적 인간을 깨우치며, 새롭게 하는 설교를 추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내적 인간을 깨우는 힘있는 하나님의 도구는 말씀과 성례임을 믿었는데, 성례는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내면과 새로운 인간에 근거를 두고, 그 정신은 신앙이며 그 역할은 삶의 열매들이라는 점에 설교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살아 활동하는 신앙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 내적 인간을 겨냥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 그리고 그 신앙 안에서 내적 인간이 더욱 강해지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외적으로 행해지는 부도덕을 중지하고 외적 덕을 실천하는 등 단지 외적 인간에만 모든 것을 집중한다면, 그러한 선행은 결코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선행은 이방인의 윤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적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행해지는 모든 일들은 위선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늘 힘써야 할 것은, 진실함으로 행하여 하나님의 사랑, 내 몸과 같은 이웃 사랑을 바르게 깨우치며, 이러한 모든 태도와 더불어 활동하는 일이다.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모든 하나님의 수단이 내적 인간을 얼마나 놀랍게 움직이는지 쉬지 않고 보여 주어야 한다”(PD 158~159).
요한 아른트의 설교 우리는 경건주의가 갖는 날카로운 영성, 곧 영적 예민성을 발견한다. 내적 인간을 향하는 영적 설교는 진정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킬 뿐 아니라, 내적 인간이 주의 성전의 지체가 됨을 인식하여 자신의 사역에 대한 소명을 확실히 인식하여 새로운 사명감을 갖게 한다. 즉 주의 몸 된 교회의 영적 지체로서 자신의 할 일을 인식하는 계기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외형적인 삶의 변화와 윤리적 태도의 열매를 가져올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영적 소명을 확실히 갖게 된다는 말이다. 경건주의는 여기에 교회의 엄청난 영적 갱신과 풍요로운 경건이 성도의 삶에서 꽃피게 될 것을 확신했다. 이를 위해 슈페너는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의 설교들이 좋은 모델이 됨을 강조했다.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들도 내적 인간을 겨냥하는 데 방향이 맞추어져야 할 것을 슈페너는 잊지 않았다. 한 마디로 경건주의는 강력한 목회 지향적 추구를 모든 면에서 시도하였다(PD 160).
“하나님의 일을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서 행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내적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각자의 성전에서 결정적인 사역을 행해야 한다. 그러한 일들에 설교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여기에 모든 기독교 신앙의 참된 능력이 존재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도의 경건은 엄청나게 고양될 것이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그 어떠한 결과보다도 말이다. 요한 아른트의 설교집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해당하는 놀라운 예를 발견하게 된다”(PD 159).
슈페너는 왜 아른트의 설교를 힘있게 추천하였을까? 특히 아른트의 설교집 《진정한 기독교(Wahres Christentum)》를 향한 슈페너의 지지는 전폭적이었다.2) 그 지지의 근거는 몇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물론 아른트를 향한 ‘잘못된 이해와 곡해’(PD 160)가 있었지만, 슈페너는 그를 “탁월한 선생, 루터의 계승자로서 루터와 같은 입장에서 행했던 사람”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첫째, 슈페너는 아른트의 교리가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를 두고 생각하고 형성된 바른 교리이며, 무엇보다도 잘못된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신했다(PD 164). 둘째, 아른트의 대부분의 저서가 내적 인간에 방향을 맞추고 있다. 셋째, 그의 설교 역시 모든 교회를 향해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넷째, 그의 설교가 많은 독자들의 경건 생활에 영향을 주어, “수천의 경건한 영혼들이 아른트의 체계 있는 바른 신앙 사역에 힘입어 새로운 능력을 체험했으며, 그러한 놀라운 작품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한 감사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아른트의 저서는 “일반적으로 호기심에 가득한 독자의 요구들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팔려지는 책들과 다르다”(PD 160)는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참되고 바른 신앙에 근거한 바람직한 경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른 신앙이란 사람들이 인정하는 교리들에 근거를 둘 뿐 아니라, 내적 인간을 겨냥하는 살아있는 지식으로 가득한 기독교적 삶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진정한 기독교》뿐만 아니라 요한 아른트의 다른 저서들도 추천하고 싶다”(PD 164).
슈페너는 아른트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루터의 표현) 타울러의 설교도 추천하는데, 이는 슈팔라틴(Spalatin)에게 보낸 루터의 편지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슈페너는 타울러의 설교집을 자신의 서문과 함께 168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슈페너는 “타울러의 책들은 위대한 루터의 저서 다음으로 훌륭한 저작들이다”(PD 149)라고 높이 평가하는데, 이러한 말 역시 당시 독일교회의 굳은 정통주의와 계몽주의의 이성적 분위기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 생각한다. 슈페너가 동의하고 있는, 타울러를 향한 루터의 말은 어떤 것들인가? 슈페너는 무엇보다도 타울러 저서들이 순수한 구원 교리를 잘 보여 주고 있음을 밝힌다.
“만약 당신이 독일어로 된 옛 순수 신학을 읽기 원한다면, 수도사 설교자였던 요한 타울러의 설교들을 읽기 바란다. 나는 아직까지 타울러의 신학보다 더 순수하고, 구원의 능력을 잘 말해 주며, 복음에 일치하는 라틴어나 독일어로 된 신학을 발견하지 못했다. (중략) 또다시 당신에게 당부한다. 나의 말을 믿고 따라 주기 바란다. 내가 이미 당신에게 당부한 대로, 구입할 수 있다면 타울러의 책을 구입하기 바란다. (중략) 그 책에서 당신은 순전한 구원 교리에 대한 방법을 배울 것이다. 대조적으로 다른 모든 교리는 이제 쇠나 흙과 같이 되었다”(PD 149~150).
심오함이 있는 설교 17세기 이성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계몽주의 그리고 화석화되어 가는 신학적 정통주의가 독일교회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설교 운동 경건주의는 황폐화되어 가는 독일교회를 바라보고 예레미야 9장 1절의 애가를 부르며(PD 55), 진정한 설교가 회복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들이 복음에 근거한 설교를, 설교의 영성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심오성, 신비성, 내면성, 경건성을 소유한 설교를 내적 인간을 향해 선포해서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하기를 원했으며, 위로 받고 새로워진 인간이 영적 소명을 바로 인식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풍요로워지기를 소망했다. 이런 맥락에서 슈페너는 아른트나 타울러의 설교가 복음의 순수성, 심오성과 신비성을 분명히 소유한 설교라고 인식했다 하겠다. 이것이 다름 아닌 경건주의자 슈페너가 설교자들에게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경건한 요망, ‘피아 데시데리아’였다 하겠다! 과연 슈페너는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에게 무엇을 간절히 소망할 것인지 묻게 된다.
미주
1) (루터교회) 경건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 Jakob Spener, 1635~1705)의 주저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 경건한 요망; 약자 PD)》는 1675년 독일 라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필자가 독일에서 직접 번역하여 1990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소책자는 주도홍 편저, 《독일 경건주의》(도서출판 이레서원, 2003), pp. 44~165에 자리 잡고 있다. 2) 아른트의 이 저서는 은성출판사에서 번역 발간되었다.
(월간프리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