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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2) - 하물며 하나님께서
2007-02-16 13:46:52   read : 1870

기도(2) - 하물며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18:1-8
정요석 목사(서초교회)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이하 생략)

오래 매달리기식 기도
‘기도’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오래 매달리기입니다. 예전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장에서 여학생들이 철봉 밑으로 고개가 떨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기도를 오래 매달리기로 착각하여, 하나님을 오래 붙잡고 매달리면 기도 응답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이를 지지하는 것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힘없고 돈 없는 한 과부가 어떤 도시의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었기에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엔 청을 들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재판관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찾아와 자기를 괴롭게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본문 말씀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된다”(18:1)라는 구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비유의 교훈이 “과부처럼 하나님이 귀찮아하실 정도로 매달려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무엇이든 기도하면 된다”라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절을 읽으면 그 뜻은 달라집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달리 우리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원한에 빨리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오래 귀찮게 굴면 응답을 하는데, 공의로운 하나님은 두말 할 필요 없이 당신의 자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설교가 끝난 뒤에 조용히 찾아와 질문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오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목사님! 두 번이나 거부된 미국 비자 건을 위해서 실망치 말고 계속해서 기도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기도하면 이번엔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되묻는 성도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네다섯 살 된 아이가 이웃집 아이가 먹는 아이스크림이 하도 먹고 싶어서, 강제로 빼앗아 먹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시다. 이것을 발견한 부모는 그 아이에게 앞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다고 해서 부모가 그 아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 줍니까? 몸에 해로운 것이나 위험한 물건은 사 주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 놓고 왜 그러냐고 아이가 부모에게 따진다면, 그것은 아이가 문맥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올바른 것을 요구하는 기도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해서, 기도하는 모든 것이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보다도 우리를 더욱 생각하시는 분이라 우리가 요구하는 올바른 것에 대하여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요구에 대해서는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의 정욕대로 요구하는 모든 것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원한이나 올바르게 진행되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응답하십니다. 응답이 되어 우리에게 좋은 것들이 응답되지, 그렇지 않은 것은 응답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6장 7~8절은 기도가 오래 매달리기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실 줄 생각하지만, 오히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지 이미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데, 더 이상 오래 매달리기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밤낮 부르짖을 때 우리의 필요를 속히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속히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본문의 비유는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각자의 정욕에 쓰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실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서너 살 된 아이가 불량 식품과 위험한 물건을 사 달라고 하면 부모는 사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가 왜 그러는지 헤아려 보지 않고 울면서 떼를 씁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주시지 않는지 잘 헤아려 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도 별 수 없다든지, 내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인간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기대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8절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34절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기르시는데 ‘하물며’ 우리야 하나님이 얼마나 잘 기르시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도 ‘하물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믿지 못해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0절에서 우리를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누가복음 18장 8절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6장 30~34절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제때에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이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작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못 들으실 것 같아 큰 소리로 외쳐서도 안 되고, 한번 요청하면 하나님이 다른 생각하시다 못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러 번 반복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삶의 원리와 기준이 되는 기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분께 우리의 필요를 말씀드리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도를 통하여 강해집니다.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은 사람의 본질과 한계를 알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간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고 그 말씀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의 법이 삶의 원리와 기준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이를 위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대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한정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삶의 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후 관계없이 맹목적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외적 성장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어지는 34절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노인 분들은 염려·근심하는 것이 몸을 망치고, 또 그렇게 해 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34절은 단순히 이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한다고 해도 실제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없고, 내일 일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하는 형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기도를 우리는 자주 도깨비 방망이 수준으로 격하시킵니다. 방망이를 두드리면 원하는 것이 나오는 것처럼,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도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와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기도하다 그만둔 제목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도록 세 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아 교만해질 수 있었지만, 자기에게 가시가 주어짐으로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시와 같은 약함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많은 일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들이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고 겸손해진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가시에 대하여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함을 자랑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보잘 것 없는 것도 자랑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시기를 기도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강함을 통하여 자기가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라고 응답했을 때 그 이유를 알고 오히려 기뻐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들어줄 때까지 생떼를 씁니다.

참으로 깊이 기도하는 사람은, 무엇을 간구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더 많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요구하는 목록이 너무 많아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입니까? 요구하는 내용에 빠져 정작 하나님은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기도
기도 응답을 말하는 종교들은 많습니다. 무당들의 굿을 통해서도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납니다. 불교에도 아이를 낳아 달라는 기도가 있고 그런 응답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긴 인생의 여정에서 그 기도 응답이 언제 어떤 독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사악한 사람이 건강을 되찾은 후 살인을 저지르는 등 오히려 병 속에 있는 것이 좋을 뻔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형성된 인맥으로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기도 응답보다 인생 전체에 걸쳐 우리를 반드시 옳은 길로 인도하시고, 반드시 좋은 것을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기도로 오래 매달리기 전에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분은 육신의 부모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0절은 ‘하물며’로 반전을 시도했고, 누가복음 11장 13절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서도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라는 말로 반전을 시도했으며 본문 7절도 “하물며 하나님께서”라는 말로 반전을 시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 그리고 그분이 자기의 독생자를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면서,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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