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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지난 시간에 우리들은 갈라디아서 11절에서 16절을 다루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을 큰 글자로 씀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논쟁을 결연하고도 단호하게 마무리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 할례를 전한 것은 내면에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오는 핍박을 면하려고 한 것이였고,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할례받은 것을 자신의 공적과 자랑거리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전하였고,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도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 이유는 십자가로 인하여 자신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불신의 눈으로 보았을때에는 십자가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였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울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 또한 바을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2)오늘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갈라디아서를 배워왔는데, 드디어 오늘 그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였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끝이 있듯이, 이 갈라디아서 강해도 오늘 드디어 끝나게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부분에서 평이한 말을 하고서 이 서신을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평이한 것같지만, 여기에는 사도바울의 전 인생의 경험이 들어있고, 또한 사도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과 소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예수의 흔적 1)먼저 17절을 보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흔적”이란 몸에 난 상처를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이라도 사도바울이 이 말에 와서는 마음이 많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서신 전체를 통하여 진리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엄중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마지막에 와서 그의 태도를 누구러뜨리며 자신의 약해진 몸과 상처난 몸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아무리 완고한 갈라디아 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도바울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 중에 그들의 잘못을 후회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도바울을 껴안고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몸에 난 상처가 자신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주기 위하여 다니다가 난 성처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였습니다. “이 후로는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2)사도바울은 과거에 복음전도로 인하여 괴로움을 많이 당한 사람이였습니다. 여러분가운데 사도바울만큼이나 복음 때문에 고통과 핍박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에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50절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당한 핍박이 나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이고니온으로 갔을 때에 돌에 맞아서 죽을 뻔한 사건이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뿐아니라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당한 핍박의 내용들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것들 모두가 사도바울에게 큰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아니라, 그의 몸에 많은 상처와 흔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에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복음 때문에여러분 죽을 뻔하였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돌에 맞았,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한 적이 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었고 추위가운데 견뎌야 했습니다. "옥에 갖힘, 쇠사울에 묶임, 채찍에 맞음, 주먹질당함, 돌에 맞음“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사도바울은의 몸에 많은 상처와 흔적들이 가졌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몸에 난 상처와 흔적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가지게 된 흔적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전한 결과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의 몸에 난 흔적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결과이기에 바로 예수의 흔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여러분의 몸에 난 상처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여러분의 몸에 난 흔적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에 그러한 흔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마음에 고통과 슬픔과 애통과 아픔의 상처가 있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올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려고 몸부림치면서 마음에 당한 고통과 슬픔의 상처들이 있습니까? 교회를 위한 염려와 고노와 낙심과 아픔의 상처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생긴 상처가 있는지 한번 자신들을 되돌아보아야하겠습니다.
4)사도바울의 몸에 난 “예수의 흔적”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였지만, 그러나 사도바울 자신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흔적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 속하였다는 확실한 증표와도 같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였다면 이러한 흔적이 없었을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거진 선생들은 이러한 상처가 그들의 몸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핍박이 없었기에 이러한 상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티그마”인데, “불도장이 찍힌 흔적, 낙인, 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사도바울 당시에 노예들의 몸에 주인이 그의 소유임을 나타내고자 가축처럼 글씨나 모양의 낙인을 찍는 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흔적”, “스티그마”는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의 흔적“을 그리스도의 종된 확실한 표시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치스럽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도바울 자신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의 표를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 이 예수의 흔적은 고통과 고난의 흔적이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승리의 흔적, 영광의 흔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환영을 받으며 성문으로 돌어오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용기와 충성을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상처와 증거들을 자랑스럽게 내어 보입니다. 그때에 그 상처와 흔적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하여 이처럼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싸웠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승리의 군사들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와 흔적들을 자랑스럽게 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예수의 흔적들은 그가 천국의 문에 들어갈 때에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 될까요?
5)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와같은 흔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의 확실한 흔적이 우리 몸과 마음에 없다면 그 얼마나 가련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이 땅의 십자가의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터인데, 그 영광의 나라의 문에 들어갈 때에 아무런 흔적도 우리 몸에 없다면 얼마나 영광의 주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잘 놀고, 잘 먹고, 재미있게 잘 지내다가 왔다고 말하면 천국의 성도들이 여러분을 어떠한 눈으로 쳐다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다 고난을 통과하여 나온 자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몸에 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을 실망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을 천국에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위하여 살면 반드시 여러분의 몸에도 사도바울과 같은 예수의 흔적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상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상처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주님의 확실한 소유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처일 뿐아니라, 여러분의 미래는 영광임을 보여주는 상처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흔적을 여러분 모두도 가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에 1)이제 18절로 가보겠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축도로서 끝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서신에서처럼 개인적인 문안인사나 그 밖의 사적인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시작할때에도 사도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하는 것처럼 사랑 어린 인사말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서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저주와 그것을 따르려는 자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마치는 부분에 있어서도 사도바울은 다른 것들을 다 생략하였습니다. 로마서를 마칠때에 사도바울은 16장 한 장을 할애하여 많은 이들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끝없이 문안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들에서도 끝 부분에 문안인사는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러한 문안인사을 우리는 볼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한지 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는냐 마느냐 하는 상황하에서 사도바울은 문안인사를 일일이 할 처지는 아니였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축도로서 이 서신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2)사도바울은 마지막에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친밀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이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좇으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도바울에게는 이들이 형제들이였으며, 사랑하는 자들이였습니다. 잠시 사랑의 매를 가지고 이 서신을 썼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의 영혼이 올바른 것을 택하여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고, 그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 얼마나 적절하고 적합한 축도입니까? 갈라디아서 전체가 다룬 진리는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전한 인간의 행위를 통한 구원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참된 것임을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논증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그것을 축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은혜가 있기를 축도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마음에 그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3)우리들은 다시 한번 이 서신을 끝내면서 모든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합시다. 이것은 평생 말해도 지루하지 않는 것이며, 영원한 천국에서도 계속 말할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고, 은혜로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며,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느 하나 우리의 행위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더 깊게 느끼도록 노력합시다.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이 은혜를 더 깊이 느끼도록 해 달라고 말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생활가운데서 이러한 은혜가 늘 마음에 넘쳐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이 이러한 축도를 갈라디아 교회에만 한 것이 아니라, 서신을 쓰는 모든 교회에 이러한 축도를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고, 빌립보서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ꎁ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에서도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도가 오늘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게 넘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갈라디아서 요약 이제 우리들은 갈라디아서를 마쳤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끝내기 전에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온 것이 간단하게 요약하면서 끝내도록 합시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우리들이 배운 것 중에서 네 가지 정도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첫번째로 우리들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기독교 안에 다른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기독교안에 참된 복음과 함께 다른 복음이 항상 병존합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러하였고, 신약시대에도 그러하였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안에서는 다른 복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단은 참된 복음을 공격하기 때문에 유사한 다른 복음들을 많이 만들어 냄으로써 사람들이 참된 복음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곳 저곳에서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때에는 사람들이 헛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이 많은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밭에 가라지를 은밀하게 심겨 놓듯이 다른 복음을 참된 복음 옆에다가 갖다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켜서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평생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이단들의 분명하게 드러나는 가르침 뿐만이 아닙니다. 이단으로 정죄받지는 않았짐나 우리 주위에 그러한 이단적인 내용의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참된 복음과 완전히 다른 그러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대가 할례 한가지를 첨가한 것이였습니다. 한가지만 첨가해도 위험한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복음들이 많이 난무하는데, 그와 같은 것들을 항상 경계하며 신앙생활해야 하겠습니다.
2)두번째는 우리들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은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서 구원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신칭의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십계명과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다 지켜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진노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태로부터 죄가운데 태어나기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달라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한편 강도는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마지막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역시 피를 흘리며 돌아가고 계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강도는 선한행동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믿어서 거기 고통의 십자가위에서 구원을 얻어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기독교는 행함으로 구원얻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얻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안에 몸담고 있으면서 신앙생활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은 모두 할례를 믿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얻어보려고 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받는 감사의 표시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순간에 우리들에게 그것은 저주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구원에 감사하여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다고 우리들에게 주님은 구원을 주셔야 된다고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례를 의지하면 자랑할 것이 있지만, 그러나 믿음은 자랑할 것이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들이 갈라디아서에서 배운 것은 십자가 복음은 핍박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할 때에 많은 핍박이 오는 법입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의 흔적을 몸에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로부터 모함과 비방의 말을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가 할례를 전하였으면 결코 그러한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동족 유대인들로부터도 칭찬과 박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전하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도덕을 말하고 사람들의 장점을 말하면 거기 핍박이 올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고, 사람들에게 성공하는 길을 제시해 주면 핍박이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말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항상 죄인들을 전제한 것이기에 사람들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이 복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싫고 거스리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확실히 지적하고, 그들에게 심판을 말하고,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말한다면 거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핍박이 따라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들이 갈라디아서에서 배운 것은 성령을 좇아서 살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두 가지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우상숭배와 술수,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의 죄악을 짓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살면 거기 성령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믿음을 의지해서 살면 그것은 성령을 의지하는 법이 됩니다. 그러나 할례를 의지하고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육체의 소욕만 강하게 마음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스스로 행하려고 하면 더욱 악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보려다가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정죄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인생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래도 거두리라”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서 살아야되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이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거룩한 삶입니다.
결론 우리들은 이와같은 것들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서의 진리들이 항상 여러분들의 마음에 살아 있어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성가는 길에는 사단이 많은 샛길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