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왓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199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노원교구 내의 목사 회의를 권혁철 교구장과 하였습니다. 권교구장이 통일교 협회에서 노원 교구장으로 박준철 목사를 임명했다고 전체 목사들 앞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박준철 목사님이 너무나도 많은 실적과 한국 최고의 공적을 가지고도 언제나 선배 통일교 목사들 때문에 교구장 자리에서 밑려났으나, 이제 박준철 목사님이 노원 교구장으로 협회의 임명을 받았으니 소원 풀이를 한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1991년 8월 30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전국의 목사들을 단 한 마디 회의나 상의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친척들을 전도하는 종족적인 메시아 활동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 전체를 단칼에 무우 자르듯 목사 직책을 박탈하여 버렸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로부터 목사직이 박탈된 후 저의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신설동 부근의 동신 독서실을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독서실에서는 독서실 실장이 관리를 잘못하여 독서실 내에서 술을 마시고 기타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추행하는등 독서실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120명 있다고 했는데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만 계약금 일부를 겨우 돌려 받고 계약금을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