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객관적인 진리를 거부한 체 자신의 주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대에 인간과의 만남이란 피상적일 때가 많다. 모두가 한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생각과 주관을 존중히 여김 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 받고 싶은 만큼 타인도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나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이전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것이 우선 갖추어야 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이리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말의 진통 속에 진지한 고민을 했고 그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요청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시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로부터 듣는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 것이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자 했는가? 그의 통찰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안고 이 시간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2. 쉐퍼가 본 기독교예술관
이 시간은 쉐퍼의 예술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쉐퍼가 강조한 바는 세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전인에 대한 강조와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쉐퍼의 예술관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이다.
쉐퍼가 본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예술관과 무관하지 않다. 쉐퍼는 예술의 기원을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계시의 주관과 객관과 우리 개인에게의 적용이라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쉐퍼는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은 예술가 그 자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은사를 베푸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진다고 말해 준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술가라고 불리우기에 충분하시다.
창조주 하나님과 예술가인 인간과는 어떤 관점에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쉐퍼는 창조주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자시라고 한다. 무한하시고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에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쉐퍼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 이것으로 인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인간은 도덕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의미이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창조적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어디서나 예술 활동을 한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사랑하는 이유도 된다". (쉐퍼, 기초성경공부, 문대규 옮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4. 10,p.16.)
쉐퍼는 창조주 하나님이 객관적인 현실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이 세상을 관조하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주관적인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상상력을 펼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쉐퍼, 성경과 예술, 김진흥 옮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5. 3. 25.,p. 61.)
쉐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주관과 객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기초를 가지고 있다...그리스도인은 뭇별을 넘어서까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다...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종교적인 주제에만 집중할 필요가 없다."
쉐퍼가 창조성을 말하면서 상상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대예술이 비관주의에 빠진 나머지 현실과 상상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쉐퍼는 이 점이 현대예술의 비극임을 지적한다. 쉐퍼는 현대예술이 상실한 인식론적 문제를 주관과 객관을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쉐퍼가 말하는 예술이란 현실과 상상을 분간하지 못하며 예술가와 관람객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작품을 통해서 굉장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예술이란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앞의 책,p. 16.)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참 아름답구나!" 스스로 감탄하시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술가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세상과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상상력이 독특하다고 해서 그 내용이 파괴적일 때 그것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아름다움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생각할 점은 전인에 대한 강조이다. 쉐퍼가 특별히 강조한 점은 전인에 대한 사상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적 사상이나 특별히 현대사회와 교회가 잃어버린 부분이다. 쉐퍼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전인으로 만드셨지 영혼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예술에 있어서 전인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예술이 그 주제가 종교적인 면에 국한되는 것에 대한 강한 우려와 경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쉐퍼는 성경과 예술에서 전인에 대한 강조를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세속적인 면들을 부각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속에 단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한 종교적인 작품이 아닌 것들로 가득 채웠다고 말한다. 또한 아가서의 예를 통해서 하나님은 태초에 남자에게 하와를 주시므로 사랑하게 만드셨으며 사랑의 시를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외면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예술가 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영혼구원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오히려 기독교 문화명령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점이다.
쉐퍼는 이 전인에 대한 강조의 원인이 기독교 예술가들이 그 주제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 치우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 전인에 대한 강조는 또한 현대사상의 뿌리가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의 이중구조에 근거한 이성의 자율주의로 인한 결과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절대보편의 진리는 전인에 대한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는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는 종교, 예술은 예술, 과학은 과학이라는 서로 통합점을 찾지 못한 채 각기 제 갈 길로 간 이유도 바로 이 이성의 자율성을 통하여 절대보편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상대주의에 내어 맡긴 현대의 사상과 종교의 문제는 기독교 예술가들의 주제가 종교에 국한되게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성의 자율성은 곧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에서 이성이 독립하므로 종교는 계시의 영역, 과학은 이성의 영역으로 각자 독자의 길을 걸음으로서 이성의 영역은 결국 특수한 사실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보편적 절대진리의 영역을 상실함으로서 종교의 영역 외의 예술 역시 의미를 상실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로 인한 종교 역시 그 영역은 영혼구원에로 축소된 경향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쉐퍼는 전인사상을 통하여 현대기독교 예술이 상실한 주제의 종교성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풍성하신 내용만큼이나 예술가들의 주제는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절박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술에 있어서의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쉐퍼는 예술가들에게 자기세계관을 갖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예술작품에는 예술가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서 그 세계관을 보며, 그 세계관속에 담겨있는 사상을 통해서 작품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예술가에게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결과는 분명하다. 그것은 대화단절을 의미한다. 결국 오늘날 빚어지는 갤러리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내용을 설명하기 보다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보고 해석하는 그것이 곧 그 내용으로 삼으라는 무책임한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관람객이 어떻게 해석하던 그것은 관람객의 것이며 그 작품을 통해서 관람객이 받은 영향은 곧 관람객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는 예술가와 관람객과의 의사소통은 부재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단절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 속에 숨어버린 채 대화의 장으로 나오기를 거부한다. 이미 우리는 우리라는 공동체의식과 이웃이라는 의식을 포기하였던 것이 아닐까? 쉐퍼는 예술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오늘의 기독교 예술은 20세기의 예술이어야 한다고 한다. 오늘날의 설교자의 설교가 20세기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듯이 현대의 예술은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천주교는 성경을 라틴어로 사용하므로서 평범한 시민들은 성경에 대하여 깜깜하였다. 신도들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쉐퍼는 그리스도인 에술가라고 해서 과거에 그리스도인이었던 렘브란트나 브라우닝을 모방하는 것은 나태라고 말한다.
둘째는 기독교 예술은 지역마다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한국인이라면 그의 그림도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표현형식은 예술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한 그 문화와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는 기독교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은 기독교세게관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기독교예술가들은 20세기의 예술형식으로 자신의 자라난 문화배경을 드러내면서, 즉 자기나라와 그 시대를 반영하면서 또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세계의 본질을 구현하는 예술활동을 해야 한다고 쉐퍼는 말한다. (앞의 책, p.51.)
그러나 우리는 20세기의 표현양식을 사용해야 하지만, 그런 양식을 만들어 낸 세게관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쉐퍼는 말한다. 더 이상 내용을 전달하지 못하는 예술형식이나 표현양식을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쉐퍼의 주장이다. (앞의 책, p. 53.)
예를 들어서 살바도르 달리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현시대의 표현양식을 빌어 왔지만 그것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도외시한 점에 있어서 그 내용의 왜곡됨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는 그 시대의 조류에 무조건적인 표현방식의 모방은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20세기의 예술형식을 사용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독특한 기독교세계관을 왜곡하지 못하게 주의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표현양식은 전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양식을 생각없이 순진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쉐퍼는 경고하고 있다. (앞의 책, p.55.)
쉐퍼가 현대예술에 있어서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대예술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쉐퍼는 현대예술이 사상의 흐름을 따라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현대예술은 의미를 상실한 극단적 단조적인 주제들로 가득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쉐퍼가 말하는 단조적인 주제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정신분열적 현상이 예술세계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말한다. 쉐퍼는 20세기 말에 처한 세계가 이미 상당히 파괴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이 그들의 전체작품들을 통해 단조적 주제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단지 우리세대의 파괴상과 비참함을 더해 줄 뿐이라고 지적한다.( 앞의 책, p. 58.)
물론 예술작품에서 장조적인 주제와 단조적인 주제로 나누고 있다. 단조적인 주제가 타락한 세상의 현상을 그대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장조적인 주제만을 다루는 것은 천진난만한 생각이라고 쉐퍼는 말한다. 비록 우리의 삶에서 불합리가 있고 타락의 영향으로 인한 상처가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들을 소망중에 극복하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쉐퍼는 장조적인 주제에 좀더 많은 비중을 두기를 예술가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책, p. 57)
3. 적용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쉐퍼가 말하는 바 삶으로서의 예술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비록 예술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 자체를 가꾸고 다듬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삶의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쉐퍼가 가장 강조하는 점이라고 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앞에 우리는 삶으로서의 예술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존재라고 대답할 수 있다. 쉐퍼는 예술가들에게 전체작품의 깊은 정신 속에 자비가 기초할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법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랑의 법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오늘의 주제들을 정리하였으면 한다. 우리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성을 따라 가치있는 곳에 드려지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혼만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전인을 사랑하는 폭넓은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삶으로서의 예배, 삶으로서의 예술에 드려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나와 이웃,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분은 필요하지만 단절이라는 패쇄적인 마음에서 열린 자세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영적 삶이요, 참된 경건이요, 예술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교회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2. 종교적 주제는 우리 문화 속에 얼마나 차지하며, 전인적 관점에서 문화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할 것인가?
3. 우리의 직업을 통하여 효과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가? 예를 들어 우리기업이 일본에 수출하려면 일본인들의 취향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에 대한 알려는 노력, 대화의 노력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의사소통에 대하여 같이 생각하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