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켄터버리 안셀무스의 인식론에 대한 소고 / 김영철 (한양대)
[요약문]
안셀무스의 인식론이나 진리론에서는 인간인식에 있어서의 최고의 당위적인 대상을 드러내려고 한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진리개념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진리로부터, 나아가서는 유일하고 최고의 진리(summa veritas)인 神에로 나아가게 된다. 최고의 진리로서의 신은 아마도 인간에 의해서는 인식이 불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의미와 관계해서 생각하면, 최고의 진리는 인간본질이 인간 스스로의 인식을 위해서 추구하는 근원이자 원인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이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진리인식에 대한 출발이자 동시에 끝으로서의 완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식이라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인간에게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로서의 신인식은 인간에게 인식의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는데, 즉 비록 신인식이 방법론적으로 인간인식의 한계이지만, 그 한계가 인간의 사고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사고영역으로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최고의 진리로서의 신이 필연적으로 사고 가능한 것이라면, 분명히 인간이성이 신적인 것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정신이 신, 즉 최고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분야: 진리론, 인식론, 철학적 신론
주제어: 진리, 유사함, 자기인식, 이성, 오성
1. 서론부: 인식 방법과 목적
1.1. 인식원리로서의 변증론
성 켄터버리 안셀무스(Anselm von Canterbury)의 많은 저작들에서 나타나며, 특히 진리론에 대한 그의 작품들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저술기법으로서의 대화형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화형식의 주된 특징은 미리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스승과 제자가 - 『신이 왜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는 안셀무스와 보소(Boso)가 -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말하자면 안셀무스의 대화록들이 갖고 있는 기본형식은, 플라톤의 전기 대화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승이 질문을 하고 제자가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나타나는 대화형식과 안셀무스의 대화록에 나타나는 대화형식에는 서로 분명한 상이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는, 플라톤이 그의 사상을 전개하는 형식이, 언뜻 보아서는 대화의 뚜렷한 목적이나 결론이 없는 듯이 보이고, 대화편을 종합해서 끝까지 보지 않으면, 그 대화편에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대화편은 플라톤의 대화편들과는 달리,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 제기되며 또한 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제시된다. 이러한 대화의 형식이 그의 대화편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물론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대화편의 초반부에 그 대화편에서 다루어지는 질문을 제시하고, 계속되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종국에는 그가 의도한 대답, 즉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안셀무스의 대화편에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과정은 문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확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안셀무스의 대화형식은 그의 사고형식이며, 그의 인식이론이나 진리론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독백하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화편들에서 나타나는 사고의 형태는 이성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변증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데, 그에 있어서의 변증론이란 인간정신이 인식목적, 즉 최고의 인식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방법론이다. 그리고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갖는 가장 주된 특징은 신과 독백하는 형식에 의해서 인간정신과 신적인 진리를 일치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이러한 독백은 자기 스스로와 더불어 사고하는 것이며, 이러한 독백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있는 모사성 (신이 인간을 스스로의 모습으로 창조했다), 즉 인간의 초월적인 근원을 재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일종의 인식의 과정, 즉 인식하지 못한 것을 인식하고,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며,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 (잠정태)을 능동화 하는 것이며, 이전의 것을 현재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갖는 고유한 점은 우선 그가 사용하는 명상(meditatio)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명상이라면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감각적 능력과 더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능력과 더불어서 가능한 것이며, 아울러 명상은 인간정신이 진리인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의 명상(meditatio)은 안셀무스가 자주 사용하는 개념들인, 사고(cogitatio)와 관조(contemplatio)라는 개념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두 개념들 또한 명상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진리인식에로 나아가는 방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안셀무스는 명상(meditatio)이라는 개념을 사고(cogitatio)와 관조(contemplatio)라는 개념과 명백하게 구분하여 사용한다. 안셀무스에 있어서, 사고(cogitatio)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생각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고는 현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단지 내용적으로만 규정을 하는 것이다. 관조(contemplatio)라는 개념은 초자연적인 정신의 능력, 즉 신적인 능력에 해당되는 것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은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직관적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명상(meditatio)은 명백히 순수하게 타고난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교육과 수련을 통하여 얻어진 사고의 형태이며,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서, 명상은 사고의 보다 더 높은 형태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신의 본질과 같은 최고의 본질(최고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인간은 그가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과 더불어서 그 것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지, 나머지의 다른 모든 능력에 의해서는 결코 자신보다 높은 존재를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즉 인간 자신의 근원인 최고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함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으로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또한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는 하나의 길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 것이 바로 명상(meditatio)에 의해서 실행되어지는 변증론의 이성적 형식이다. 명상이란 정신이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보다 더 이성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형식이며, 변증론도 또한 사고의 논리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논리적 행위는 단지 추상적이고 내용이 없는 개념들과만 관계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표현이나 언어들과도 또한 관계하고 연구를 한다. 따라서 변증론은 단지 순수한 언변술로서만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 변증론은 보다 더 실제적인 연구이며, 실제의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물론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변증론의 첫 번째 관심은 진리, 즉 최고의 진리를 찾고자 함에 있으며,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식의 중심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안셀무스는 변증론을 진리인식의 원리로 간주하고 있다.
안셀무스에 있어서 변증론이란 그의 인식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사고의 방법론적인 실행인데, 여기서 사고의 실행이란 우선 명상의 형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정신의 최고능력인 이성 (ratio)의 작용에 의해서 확장되어지는 인식의 행위이다. 안셀무스의 변증론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성(ratio)인데, 그의 논증형식으로 잘 알려진 '이성' 또는 '이성만'에 의한 인식과정은 사고의 변증론적인 형식에 의해서 파악되어질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변증론은 진리인식을 위한 과정이자 동시에 이성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이성이란 안셀무스에 의하면, 인간정신의 최고의 능력이고, 이 것은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으나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진리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이러한 진리인식에로 이끌고 깨우치는 것이 바로 안셀무스가 말하는 진리인식의 변증론적인 방법의 과제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안셀무스는 진리를 인간의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서, 즉 우리의 내부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근원에 대한 해명을 우리 자신에서 찾으려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변증론은 자신이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며, 인간 이성의 스스로의 인식과정이며 또한 스스로에 의해서 자신 안에 기거하고 있는 진리를 인식하는 과정인 것이다.
명상의 형식을 취하면서 이성에 의해서 실행되어지는 변증론은 명백히 안셀무스가 논증술 (scientia disputandi argumentandique)이라고 표현하는 하나의 학문적 양태인데, 이 점에서 변증론은 스콜라학(Scholastik)과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스콜라학이란 고유한 의미로는 중세대학의 교수방법을 칭하며 따라서 학교철학이라고 불리어지며,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대표한다고 하겠는데, 일반적으로 체계와 연역과 같은 논리적이며 학문적인 방법론들을 가리키며, 또한 학교수업에 사용되는 교수학적인 방법들인, 단편적인 것을 이해하고(lectio), 논쟁하고(disputatio) 그리고 증명(argumentatio)하는 방법과 쌍방의 이견을 서로 조정하는 방법 등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스콜라학이 지니는 의미가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지니는 의미와 매우 습사하나, 단지 두 가지 점에서만 양자가 명백한 차이를 지니는데, 첫 번째는 문법(grammatica)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상반된다는 점이다. 스콜라학에서는 문법을 논리적인 문제나 진리에 대한 문제들을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나,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문법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으로서의 역할을 지니지, 드러나지 않는 진리를 밝히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문법은 문법이 지니는 형식성 때문에 때때로 변증론적인 관계들을 간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증론적인 관계들을 이끄는 것은 이성(ratio)이며, 이성은 일상적인 언어의 진술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 즉 불충분하면서도 어느 정도 감추어져 있거나 함축하고 있는 것을 구별해낸다. 문법은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외적이며 진술되어진 형식성을 (vox의 의미만을 지닌다) 지니며, 순수한 외적인(지시적인) 형식으로 보지 않는 문장(propositio)의 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변증론은 문법과는 달리, 단순히 진술 또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물과 사물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관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스콜라학과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갖는 두 번째 차이점은, 안셀무스의 변증론에서는 초이성적인 본질을 해명하고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두고 있지만, 스콜라학의 방법론에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져온 자료들 또는 신학적인 서적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는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지니는 특성에 의하면, 그의 변증론은 단지 하나의 목적, 즉 최고의 진리를 구하려고 하며, 그 것과 더불어서 자신의(인간) 근원 또는 스스로의 인식(자기인식)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결국 안셀무스의 변증론이 이성만에 의해서(sola ratione) 진리인식에로 나아가려는 계획(시도)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1.2. 인식목적
위에서 이미 거론한 바와 같이, 안셀무스의 진리론 내지 인식론의 목적은 진리, 즉 최고진리에 대한 해명이다. 그리고 이 것은 분명 비단 안셀무스만의 목적이 아니라 대부분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중심문제이기도 하다. 안셀무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그가 주저인 『모노로기온(Monologion)』의 초반부에서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성(ratio), 즉 이성만을(sola ratione) 진리인식의 출발점으로 상정한다. 만일 인간이 단지 평균의 [보통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최소한 그의 이성에 의해서 그리고 이성의 인도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이성은 단지 인식의 출발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정의 끝, 즉 인식이 완성될 때까지 작용한다. 이 것은 결국 이성이 인식의 전반에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성에 의해서 진리의 인식이 시작되고 파악되며, 결국에는 이성에 의해서 진리의 인식이 정립되고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것은 결국 인간이성이 우선 스스로를 인식하고, 계속해서 최고의 인식대상인 신인식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성이 두 단계의 인식과정, 즉 자기인식과 신인식이라는 단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적인 요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Hegel)과 같이, 우리는 결코 완전한 진리를 인식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진리의 인식은 우리인간의 세계에서는 끝없는 인식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하는 인간정신은 아마도 명백히 참된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에 있는 가장 명백하고 구체적인 개념, 즉 절대적인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유한적인 것에서 무한적인 것에로의 추론, 즉 나아감이 바로 안셀무스에게서의 이성의 역할이며 또한 과제이고,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이성과 더불어서만 신인식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성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한 스스로를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종국에는 자기인식에 도달해야만, 그 다음으로 진리 내지는 신인식의 가능성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이 것은 결국 진리, 즉 신인식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의 인식, 즉 자기인식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순간을 안셀무스는 유사성(similitudo)이라고 칭한다. "유사함에 의해서 점점 더 자신의 인식에 접근하는 것은 명백한데, 왜냐하면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본질인 인간은 정신에 의해서 그가 지니고 있는 최고본질과의 유사성과 가장 우수하게 창조되어진 스스로의 본질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신의 모상이며, 인간 정신에 의해서 최고로 도달 가능한 단계로 이해되어지는 유사성에로 이끈다. 유사성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분명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이다. 인간의 정신은 단지 유사성안에서만 최고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정신은 자신의 참된 본질과 신과 인간정신의 유사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과제는 신과 인간정신 사이에 있는 유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진리의 존재론적인 척도(Ma )로도 이해가 가능한데, 왜냐하면 유사성은 종국에는 신적인 것과 스스로 연결되며 또한 신적인 것에서 그의 척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신, 즉 진리에 대해서 사유를 할 수 없고, 오직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관계 안에서만이 신인식에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과 정신 안에 있는 최고의 진리로서의 神인식를 구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안셀무스에게서는 인간정신에 내재하면서 정신을 이끌며, 완성시키고, 인간정신의 자기인식과 신인식을 정립하는 이성(ratio)인 것이다. 이성은 진리인식에 대한 열정에 단초를 제공하며, 아울러 스스로 진리인식에로 나아간다. 하지만 분명, 비록 인간정신이 진리의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정신의 진리, 즉 인간정신이 구하는 진리가 인간정신 자체 보다 더 크다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 점이 바로 안셀무스 사상의 특징이다. 즉 어떻게 인간정신이 보다 더 존재인 신인식에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이며, 이 같은 문제를 유사성(similitudo)의 개념 안에서 그리고 이성(ratio)의 역할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한 것이며, 이 것이 바로 그의 진리론의 핵심인 것이다.
2. 본론부: 인식의 길
안셀무스는 진리개념을 통해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인간인식에 있어서의 최고의 당위적인 대상을 드러내려고 한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진리개념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진리로부터, 나아가서는 유일하고 최고의 진리(summa veritas)인 神에로 나아가게 된다. 최고의 진리로서의 신은 아마도 인간에 의해서는 인식이 불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의미와 관계해서 생각하면, 최고의 진리는 인간본질이 인간 스스로의 인식을 위해서 추구하는 근원이자 원인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이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진리인식에 대한 출발이자 동시에 끝으로서의 완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식이라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인간에게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로서의 신인식은 인간에게 인식의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는데, 즉 비록 신인식이 방법론적으로 인간인식의 한계이지만, 그 한계가 인간의 사고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사고영역으로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최고의 진리로서의 신이 필연적으로 사고 가능한 것이라면, 분명히 인간이성이 신적인 것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정신이 신, 즉 최고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사물들의 진리들로부터 최고의 진리, 즉 신인식에로 나아가는 길이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인간이성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규정되는데, 이러한 의미는 우선, 인간이 직접적으로 최고의 진리인 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우리의 인간적인 사고에서의 신개념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신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은 인간정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신과의 유사성(similitudo)에 의해서 점차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정신은 최고의 진리인 신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정신은 항상 '어떤 것에 의한 (per aliud)'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정신의 무능함에 불구하고 최고의 진리인 신은 인간정신의 최고의 인식목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에 우리의 고유한 정신적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다면, 즉 완전한 신인식을 이룰 수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유사성에 대한 사고'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유사성에 대한 사고'란 인간정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질문하고 또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정신 스스로의 반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신은 외부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스스로에 대해서도 사유하고 또한 파악하며, 정신 내부에 있는 신과의 관계를 설정함에 의해서 스스로가 신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의 모상(신과의 유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로부터 신은 다시 인간의 인식대상으로 가능해지며, 인간정신과 인간정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신의 관계로서 다시 정립된다. 신은 더 이상 인간의 가장 외적인 인식가능성이 아니고, 인간정신의 가장 내적인 인식대상으로서 인간정신에 주어져 있는 것이 된다. 만일 인간정신 스스로가 신의 모상임을 이해한다면, 신이 인간정신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나 만일 인간정신이 이러한 정신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인식, 즉 자기인식도 또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아주 명백한 것은, 이성적인 정신은 보다 더 스스로의 인식에로 나아가야 하며, 보다 더 열정적으로 스스로를 알려고 해야하며, 스스로의 빛에 의해서 보다 더 스스로를 직관해야한다." 결국 인간정신에서 신인식에로 나아가는 길은 인간정신이 스스로의 인식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는 진리인식을 위해서 우리의 정신 자체를 전체적으로 문제삼고, 아울러 신과의 관계에 있는 정신 스스로에 대해서 사유해야한다. 그러므로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인간정신은 최고의 진리인 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유일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인식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2. 1. 이성 (ratio)
이성 (ratio)의 기능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서, 주지해야할 점이 있는데, 안셀무스는 그의 저작 전반에서 보통 정신(mens)과 이성(ratio)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혼동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안셀무스에 있어서 정신(mens)이란, 통상적인 의미의 인간의 정신 또는 사고에 해당되는 표현이며, 또한 정신(mens)이란 개념은 이성적 정신(mens rationalis)이란 의미에서 이성(ratio)과 동일한 의미를 갖게된다. 이성이 정신과의 연관관계에서는, 이성은 정신이 사유하고 행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instrumentum ratiocinandi)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성의 행위가 없이는 정신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고, 정신의 사유가능성이 이성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은 단지 이성에 의해서 사유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아무튼 안셀무스가 이 두 개념을 경우에 따라서는 동일하게 또는 상이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구분 없이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성 (ratio)이란 안셀무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정신 가운데서 최고의 인식능력이다. "이성은 모든 것의 원리이며 또한 심판자이다 [princeps et iudex omnium]." 이 것은 인간의 이성이 가장 포괄적인 정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에 의해서 생각되어질 수 있고 또한 생각되어진 모든 것(omnia) - 인간에 관한 모든 것 - 과 관계를 한다. 이성은 모든 것의 원리로 생각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성은 이러한 전체성으로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사고영역을 드러낸다. 이성은 사고과정 안에서 스스로의 시작이며, 그가 사고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만일 정신이 스스로를 사유한다면, 정신은 이미 타자와의 관계에 있으며, 그러나 이 타자는 정신의 타자가 아니라, 정신과의 관계 안에서의 타자요, 정신의 자기관계성 안에서의 타자이다. 이러한 사고관계와 인간정신의 자기관계성은 신인식에도 부합된다. 만일 이성이 스스로 신에로 향한다면은, 이성은 스스로에 귀환한다. 그리고 만일 이성이 스스로에 귀환한다면, 이성은 이미 신에 있다. 신은 이성에게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임의의 것이 아니라, 신은 이성이 신에 대해서 사유하자마자, 이미 이성에 스스로 부가한다. 그리고 이성 스스로도 또한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사고에 있어서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신은 스스로가 이성에게 자신을 사유하게 하며 인식하게 한다. 이성은 신을 인식하기 위해서 스스로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안셀무스는 그의 주저인 『모노로기온Monologion』의 서두에서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아울러 그것을 신인식의 유일한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성이 단지 신인식이나 최고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이지, 결코 신인식의 필연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ratio)은 신적정신(spiritus)이라는 개념과는 구분되는데, 왜냐하면 신적정신(spiritus)은 인간정신의 능력이 아니라, 최고의 정신, 말하자면 신 자체인 것이다. 신인식에 대한 필연적이고 완전한 조건은 단지 신 자신만이 지닐 뿐이지,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신인식에로의 순수한 가능성 또는 가능한 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성은 신인식에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인 것이다. 이성이 신인식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한은 이성의 과제는 명백해지는데, 즉 이성이 신인식에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성 스스로가 완전함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성이 스스로의 인식에 도달해야한다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이성의 과제와 이성의 고유성의 인식에 의해서만 신인식의 가능성이 제시되며, 동시에 인간이성과 신의 연결이 가능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신적정신과는 본질적으로는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신을 본질적으로는 동등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성이 신을 인식하고자 한다면, 우선 스스로의 반성이나 자기이해를 통한 자기인식에 도달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 즉 자기인식이 바로 이성이 신인식에 나아가기 위한 우선된 과제이며 동시에 이성이 지니고 있는 고유성이라는 것이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이성(ratio)의 과제는 이성 스스로의 자기인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분명 이성은 자기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안셀무스가 말하는 '반영(speculum, 거울)'라는 표현에서 알 수가 있다. 반영(speculum)이란 안셀무스에 의하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성은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고, 이러한 반성을 통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의 모상을 인식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이성이 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 스스로를 명상함에 의해서 자기인식에 도달하며, 더불어서 최고의 단계에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K. Kienzler의 '반영(speculum, 거울)'에 대한 견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신(神)과 정신의 관계는 거울과 같으며, 거울은 타자 안에 있는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이나 신의 인식에 나아가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을 거울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스스로의 명상을 통해서 모든 것의 인식에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자신에로부터 타자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결국 자기인식 안에 신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인식이나 신인식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성(ratio)이 항상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끊임없는 명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사유로서 이성(ratio)은 우선 인간적 정신적인 한계, 즉 인간정신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단계에로 상승해야만 하고, 그 다음에 인간정신과 신적인 정신과의 통일 내지는 일치에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두 개의 정신적인 영역을 통일하는 이성적 능력은 두 개의 특수한 기능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성은 우선 두 개의 기능을 갖는데, 말하자면 '구분하고 (discernere)' '판단하는(iudicare)'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정당하지 못한 것과 정당한 것을, 참되지 못한 것과 참된 것을, 선하지 못한 것과 선한 것을 그리고 어느 정도 선한 것과 보다 더 선한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이성은 어떤 것이 참으로 선하며 선하지 않는가를, 그리고 어떤 것이 덜 선하고 또한 보다 더 선한가를 판단한다. 이러한 이성의 구분능력과 판단능력은 단지 명백한 척도(기준)에 의해서만 실행되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명백한 척도는 인간정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 안에 스스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이성 안에 내재하고 있는 명백한 척도가 바로 안셀무스의 진리론의 가장 핵심개념이자 모든 진리의 기준으로 간주되는 '올바름(rectitudo)'의 의미와 일치한다. 그래서 이성이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은 이성 스스로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척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이성(ratio)과 올바름(rectitudo)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이성은 진리나 신인식의 능력이며, 스스로의 사유에 의해서 자기인식에 도달 가능하며, 자기인식 안에서 진리, 즉 신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름은 진리인식에 대한 인식능력이 아니라, 진리의 척도이며 진리 자체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이성은 참되지 못한 것들로부터 참된 것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진리의 척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성은 진리의 척도인 올바름(rectitudo)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단지 이러한 척도, 즉 올바름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은 이러한 진리의 척도인 올바름을 스스로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성은 진리의 척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자기 스스로를 사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올바름을 이해한다면, 이성은 스스로에 의해서 파악된 올바름과 더불어서 진리의 인식에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름은 진리가 참으로 진리인가, 즉 올바른 진리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올바름(rectitudo)은 인간정신의 자기인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올바름은 단지 인간정신에 의해서만 도달 가능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성에 대한 우리의 고찰에 의하면, 안셀무스의 진리론은 신학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식론적인 영역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며, 아울러 여기에서의 중심문제는 직접적으로 신인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깃들여 있는 신인식(진리인식)에 대한 가능성과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해서, 이성(ratio)은 이중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이성은 스스로에 의해서 도출 가능한 모든 것들과 더불어서 사물을 파악하고, 다음으로는 이성이 자기상승에 의해서 새로운 보다 더 높은 단계에 대해서 사유한다. 이러한 스스로를 사유하고 반성하고 명상함을 통해서 자기자신에 내재하고 있는 선험적인 가능성, 즉 진리인식에 대한 가능성과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자기상승을 의미하며, 아울러 이러한 사유의 형식이 바로 결국 플라톤적인 선험적인 사유(transzendentales Denken), 즉 자신의 내면에 비밀스럽게 머무르고 있는 진리를 인간정신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재인식 내지는 재기억 또는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2. 오성(intellectus)
안셀무스의 오성(intellectus)이란 개념은 다른 정신적인 능력들인, 즉 이성(ratio)과 기억(memoria)이라는 개념들과 거의 의미상으로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성(intellectus)을 정확히 규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오성(intellectus)은 이성(ratio)에 비해서 보다 더 외부적인 대상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이 것은 달리 말하자면, 이성도 외부적인 대상들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은 직접적으로 외부적인 대상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성 안에서만 외부적인 대상들과 관계를 갖는다. 오성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사물의 외적이고 물질적인 형식성을 규정하는 능력이며, 그 이상의 사유기능들은 이성이 갖는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포함하는 것을 보통 인간정신(mens humana)의 능력이라고 칭한다. 아무튼 이성과 오성을 구분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은, '저기에 하나의 작은 빨간 장미가 있다' 그리고 빨간 장미가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자! 이 경우에 있어서 오성은 장미가 있는 장소(저기), 크기(작은), 색깔(빨간)은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 즉 빨간 장미가 지니고 있는 속성이나 숨겨져 있는 의미인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규정기능을 갖는데 반해서, 이성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통일하고 또한 추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성의 추론 기능은 오성의 보다 높은 그리고 확장된 형식으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의 기능은 단지 오성 안에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성은 이성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진리에로 접근할 수 가 있다. 오성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진리나 신인식에는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이성과 결합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ratio)이 오류를 지니지 않고 항상 올바름(rectitudo)만을 지닌다면, 오성(intellectus)은 이성과는 달리 많은 오류를 지닐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성은 현상에 있는 사물들이나 외부적인 대상들을 파악하는데, 외부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은 참되고 올바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성은 엄밀하게 말해서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은 아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오성은 이성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진리나 신인식에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오성 안에서 존재하고 또한 오성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성은 오성의 한 기능으로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안셀무스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서로 구분 없이 바꾸어가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안셀무스에 있어서 오성(intellectus)은 또한 신앙(fides)의 반대개념으로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안셀무스는 그의 유명한 프로그램인 '이성을 구하는 신앙(fides quarens intellectum)'의 도입부에서 이 두 개념을 구분하고자 하며, 여기서 우선 신앙은 오성(intellectus)의 반대개념으로 규정한다. 신앙이란 라틴어로 credere인데, 원래는 아무런 신앙적인 사건에 대한 보증도 필요 없이 '신뢰한다' '신뢰를 준다' '믿는다' '믿음을 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신앙은 오직 신앙적인 사건에 대한 신뢰와 확신에만 기초하며, 아울러 신앙은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필요 없이 무조건적인 확신에 바탕을 둔다. 오성(intellectus)은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한 보증을 제시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식행위이다. 그는 영혼(anima)의 도구들인 감각들과 관계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들이 현상이나 경험의 영역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서 사물들을 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물들은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인식되어지는 것이지, 결코 감각에 의해서 파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리나 거짓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판단(opinio)하는 인간의 정신에 놓여있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감각의 기만은 감각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판단, 즉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성(intellectus)은 진리에 대해서 보증을 제시할 수 없고, 반면에 신앙(fides)은 진리에 대한 보증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오성에 대한 안셀무스의 견해를 정리하자면, 오성(intellectus)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참되고 올바른 인식에 대한 정신적인 능력이 아니고, 현상에 주어져 있는 사물에 대한 이해의 능력이다. 그리고 오성은 혼자서는 보이지 않으며 또한 본질적인 것인 진리나 신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이성(ratio)과의 결합에 의해서만 진리나 신인식에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오성intellectus)은 이성과의 결합체로서 외적인 것과 인간정신의 내적인 것의 통일로서의 인간의 자기인식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오성은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자기 스스로를 인식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진리와 신인식의 시작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자기의식으로부터 진리나 신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3. 기억(memoria)
기억(memoria)은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인간정신의 능력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앎이며 또한 망각한 것을 다시 포착하고, 재기억하고, 현재화하는 인식능력이다. 기억이란 고유한 의미에서는 이전의 것을 감지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이전의 것이나 과거의 것에 대한 사유라기 보다는, 지금 있는 것이나 현재에 대한 사유이다.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기억(memoria)은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으로서의 저장(Ged chtnis, 기억력), 즉 과거의 것을 머리에 저장하거나 보존 또는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저장(Ged chtnis)은 기억되어진 것과 기억의 재생산과 관계하는 기억의 공간적인 형식 또는 형상이다. 저장(Ged chtnis)은 또한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지된 사물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저장은 기억이 능동적인 행위나 활동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단지 순수한 수용적인 행위이거나 또는 기억의 수동적인 행위로서 간주되어질 뿐이다. 안셀무스에 있어서, 기억(memoria)은 기억의 순수한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기억은 저장(Ged chtnis)안에 있는 정신적인 행위이다. 기억은 저장 안에 있는 내용이나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고 또한 현재화하는 능력이지, 결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억 내지는 기억력, 즉 저장(Ged chtnis)이 아니며, 그러므로 기억(memoria)과 저장(Ged chtnis)은 동일하게 생각되어질 수 없다.
능동적인 정신의 행위로서의 기억(memoria)은 인간정신의 행위과정의 시작, 즉 인식의 출발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정신의 자기인식이 정신적-내면적 선조건(Vorbedingung)이며, 동시에 모든 대상인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은 망각한 것이나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을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에 인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기억이 없다면, 이성 또한 대상과 대상의 올바른 인식, 즉 '올바름(rectitudo)'을 깨닫거나 또는 인식할 수가 없다. 기억은 사유의 가능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대상의 올바름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선 기억에 의해서 드러내어진 대상에 관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물도 인간정신의 스스로의 기억이나 인식 없이는 사랑[종합]되어질 수 없고, 사랑되어지지 않은 모든 것들은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식되어진다." 아무튼 기억(memoria)은 순수한 가능성(potentia)이 아니라, 정신행위의 시작이다. 기억은 인간정신에 앎(인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모든 대상적인 앎은 인간이 스스로 기억해 냄으로서 가능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사유의 시작이다. 그리고 기억은 이 순간에 이성(ratio)과 결합되고, 이성과 더불어서 가장 외부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근원적인 인식에로 나아간다. 기억과 이성의 결합에 의해서 인간정신이 자기인식에 도달하게되며, 종국에는 신인식에로 나아간다.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인식, 즉 모든 인식의 단초는 결국 인간의 정신내면에 이미 인식 가능한 모든 것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내재되어 있는 인식대상 내지는 진리를 인간정신이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정신은 기억을 통해서 모든 인식, 즉 내면에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기억에 의해서 내면에 인식대상이나 진리를 드러내고, 그 다음으로 그러한 대상인식을 이성이 판단하고 구분하여 올바른 인식 내지는 기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인식은 기억과 이성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만일 기억이나 이성이 없다면 인간의 참된 대상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기억(memoria)이란 개념은 인간이성의 인식 또는 인간의 자기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단초인 것이다.
3. 결론부: 인식의 근거이자 완성으로서의 유사성(similitudo)
지금까지의 고찰은 진리인식에로 나아가는 사유의 과정으로서, 즉 인간정신의 자기인식에 대해서 논하였다. 안셀무스는 철저하게 신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러한 가능성을 인간정신의 내면이나 자기의식에서 그 가능성을 열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정신이 자신의 이해를 통해서 신인식, 자신의 명백한 이해로부터 신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는 분명 신인식에 대한 열망은 결국 정신 안에서의 인간의 자기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안셀무스는 진리나 신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두 개의 사유과정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첫 번째 사유의 순간은 전적으로 정신 스스로에 침잠하여 자신의 원리와 근본질서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정신은 스스로를 밝히고 그리고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다음 단계의 정신의 사유 순간은 완전한 신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정신 스스로에 의해서 정립한 것을 넘어야만 한다. 안셀무스는 이러한 순간을 정신으로서의 유사성(similitudo)이라고 한다. "어떤 한 인식에 보다 가까이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니는 유사함에 의해서 가능하다."
안셀무스의 유사성(similitudo)에 대한 사고는 우선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것에서 출발하면서, 인간정신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단지, 정신이 스스로에 질문하고 그리고 자신의 본질이 신과 닮았다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정신은 사유 가능한 가장 현상적이고 외적인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체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의 새로운 관계로서, 즉 정신 스스로가 신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귀착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 즉 정신과 정신이 사유하는 신과의 관계가 안셀무스에 있어서 신인식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신에 대한 숙고는 인간정신이 신의 모상 또는 신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분석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신은 더 이상 인간정신과는 다른 영역, 즉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것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이 신을 인식하는 과정은 정신 스스로를 파악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스로 넘어설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다 명백한 것은 이성적인 정신이 신인식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정신 스스로가 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안셀무스에게는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사고가 인식과정을 구성하는 필연적인 요소이며, 동시에 동일성, 즉 인간정신이 신과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추구이다. "정신과 정신의 선험적인 근거간에는 일치가 있어야만 하는데, 만약 그러한 일치가 없다면 양자의 문제, 즉 정신이 자신 스스로에 있으면서 또한 정신 자신을 넘어서야만 하는 문제와 선험성이 정신 자신에 있다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선험성이란 정신을 벗어나 있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내적 필연성이다. 따라서 정신은 자기 스스로로부터 자신의 선험성에로 나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정신과 자신의 초월적인 근거간의 일치는 일종의 유사성(similitudo)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진리의 기준(척도)으로도 이해가 가능한데, 왜냐하면 진리나 진리의 유일한 척도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사함은 그의 근거인 신적인 것과 연결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이 진리인식 또는 신인식에로 나아가는 길은 신과의 유사함, 즉 신의 모상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성적인 정신은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혜(summa sapientia) 또한 사유할 수 있으며 인식할 수 있다. (.....)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과의 막연한 유사성에 의해서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정신이 최고의 정신과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안셀무스는 계속해서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사고를 보다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즉 인간정신과 신적인 것의 차별성을 줄이고 또한 종국에는 인간정신과 신적인 것이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술작품의 창조에 대한 예로서 제시한다. 안셀무스가 생각하는 예술적인 창조의 예는 분명히 예술가와 작품의 일치, 즉 신과 그의 창조물이 일치한다는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선 예술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에의, 예술가가 지니고 있는 모든 예술적인 역량이 통일(내부적으로 모으는)되는 과정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다음으로는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의도가 통일되는 과정으로서 자신이 고안한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바쳐 의도한 작품을 완성하며, 끝으로는 그 예술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셀무스는 이러한 예술작품이 창조되는 과정은 - 다양성에서 통일성에로 나아가는 과정 - 내적으로 필연적인 통일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제반의 요소가 종국에는 다 통일되어져서 하나의 예술작품이 완성된다고 보았으며, 예술작품의 완성은 결국 다양성이나 차별성에서 동일성이나 통일성이 찾아지거나 또는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안셀무스는 예술작품의 창조를 유사성에 대한 사고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유사성(similitudo)은 예술적 창조의 내적형식이며 사유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적인 의도나 생각에 의해서 작품을 완성한다. "만일 정신에 어떤 것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미리 계획이 없다면, 혹은 형상이나 유사성 또는 규준이 없다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어떤 것이 절대로 누군가에 의해서 어떠한 식으로든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내면적인 생각이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유사성, 즉 예술가의 내면의 세계와 현상에 드러나는 예술품이 유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형상이나 규준을 가지고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생각과 예술작품이 종합되는 것은 일치와 유사성에 의해서 가능하며, 따라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정신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예술작품이 창조되는 과정의 예에서 창조자와 창조물의 동일성을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 내지는 통일성을 유사성(similitudo)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유사성은 하나의 인식의 새로운 요소로서 간주되어야만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요소인 유사성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근거 또는 근원을 추구할 수 있다. 유사성은 우리 인간정신이 진리나 신인식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사성은 인간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아울러 유사성안에서는 인간정신과 신적인 것이 서로 동일시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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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ie kleine Untersuchung zur Erkenntnislehre
bei Anselm von Canterbury
Kim, Young-Chul (Hanyang Uni.)
Die Anselmische Erkenntnislehre bzw. Wahrheitslehre hat den Zweck, den h chsten gesollten Gegenstand f r die menschliche Erkenntnis zu zeigen. Der Wahrheitsbegriff f hrt nach Anselm von der einzelnen Wahrheit der Dinge mehr und mehr in die einzige und h chste Wahrheit, n mlich die 'summa veritas' als Gott. Die h chste Wahrheit als Gott w re aber f r den Menschen selbst nicht erkennbar. Sie ist in dem Sinne der 'imago dei' der Grund und die Ursache des Menschen, wonach das menschliche Wesen strebt, um sich selbst zu erkennen. Dieses Selbst-Erkennen ist f r Anselm der Anfang und das Ende der Erkenntnis der Wahrheit. Denn die Gotteserkenntnis ist, methodisch gesehen, beim Menschen eine Grenze. Sie ist sowohl durch die inhaltliche Steigerung des Menschen als auch durch die Notwendigkeit der Denkbarkeit bestimmt. Insofern Gott notwendig denkbar ist, erweist sich, da die Vernunft des Menschen an das Denken Gottes gebunden ist. Die Gebundenheit des menschlichen Denkens an Gott, bzw. an die h chste Wahrheit er ffnet die M glichkeit zur Erkenntnis der Wahrheit.
Schluesselwoerte: Wahrheit, Aehnlichkeit, Selbsterkenntnis, Vernunft,
Verst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