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2006-05-18 19:24:58 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
나두산 목사(「아름답고 은혜로운 한국교회이야기」저자) |
1. 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대 부흥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년 6월 25일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레이놀즈W.D. Reynoldes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한국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 '한국기독교회'라 하리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의 자립·자주적인 민족교회의 형성,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한 기독교회의 형성에 대한 범주적인 요청은 이렇게 해서 널리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에 한 획기적인 모멘트가 그 형성력에 부여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1907년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이었다. 부흥회의 원류 이 부흥회를 가능케 해서 전국을 휩쓸게 한 물결은 두 군데서 흘러 왔다. 한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원했다. 1903년 원산元山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교인들까지 가세하게 되었고, 이때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Dr.R.A. Hardie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 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Rev.A.F. Robb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있던 전계은全啓恩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 했고,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또 하나의 흐름은 바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신앙 생활의 경건에서 왔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성內省,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한국인들의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흘러 왔던 것이다. 목사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한국 최초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던 그의 성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바로 1907년 대 부흥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부흥의 용솟음치는 성령의 샘은 원산의 전계은, 정춘수와 아울러 평양의 길선주, 이 세 한국 목사의 신앙 체험에서 연원했고, 따라서 그 부흥 뒤의 한국 교회의 신앙도 이들의 영성이 농도 짙게 그 언저리에 스며있게 된 것이었다. 1907년 1월 13일, 평양 장대현 전날 하디 선교사의 집회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부흥회는 다음 주일 밤 길선주가 인도한 집회에서 그 성령의 불길이 터져 올랐다.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교회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였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힘있는 영적 압력이 베어 구속하는 듯하였다. 다음날 월요일 밤에도 장중한 신비의 세력이 임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성령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전형적인 평양 대 부흥의 분위기가 감격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런던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마자, 밖으로부터 흠뻑 밀려드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했고, 그 감동의 격류는 몇 일 밤낮을 계속했다. 통성 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그 통회 자복의 광경을 묘사하는 한 여 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저런 고백들!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젖힌 것과도 같다. ...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저 죄악의 고백들,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이 무엇으로 이런 고백들을 강제할 수 있으랴? 많은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에의 두려움에, 마루에 얼굴을 가리우고 슬피 탄식하였다." 2. 길선주의 생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19대 후손 1869년에 안주安州에서 태어난 길선주는 고려조의 학자 야은 길재 선생의 19대 후손이었으며, 영계靈溪는 그의 도호道號가 된다. 그의 모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정숙 온화하였으나 자녀 교육에는 엄격하였다. 선주는 4세 무렵부터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무렵엔 당시의 이름 높은 어느 한학자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선주는 막내였던 고로 어머니의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그 나이 또래에 비해서 총명하였다고 한다. 선주가 12세 되던 무렵의 일이다. 한문 사숙에서 공부할 때, 서동書童들이 오언 한시를 제각기 지었는데, 그 가운데서 선주의 시 세 귀三句가 관주를 맞고 장원을 했다. 번역해 보면 이렇다. 농부의 아내 되게 하지 마라 해마다 고생이 이 같으니 옥같은 손에는 고초가 끊임없고 꽃다운 마음에는 한이 쌓이는구나 청루에 그 뉘 댁 규수였던고 이제 밤마다 끌리는 옷 닳는 소리 뿐이로고. 생生의 회한과 선도仙道 입문 안주가 속한 관서 지역은 대대로 중앙 정부의 견제를 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아울러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고, 또 좌절되면서 민심은 더더욱 흉흉해지고 사회는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1885년, 선주의 나이 17세 무렵,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집으로 난입한 모리배들의 폭행에 선주가 거의 죽다시피 할 정도로 상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선주의 부친은 복수의 일념으로 평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한에 사무친 앙갚음의 칼을 갈아오는데, 그 모리배 일당이 예기치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었다. 이 무렵 선주는 우주 공리의 엄연히 살아있음과, 선과 공의가 인생사의 주초가 되고 있음을 느껴가고 있었으나, 워낙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은 터라 세상은 허무하고 인생은 무상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한 염세적인 생각들은 선주로 하여금 장차 영계靈界를 더듬게 했고, 영원 세계에의 탐구로 몰아 갔는지도 모른다. 인생사에 대한 환멸과 병약한 몸으로 심신이 기울던 19세 무렵, 선주는 관우 장군을 섬기는 관성교의 제문 몇 가지를 정성 들여 외우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관우와 어느 중이 논쟁하고 있길래, "승속僧俗이 유별하거늘 어찌 감히 관공을 희롱하는가?" 했더니, 곁에 있던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보정대사保精大師를 몰라 뵈는가?" 하더란다. 선주는 깜짝 놀라면서, "만일 그 대사님이라면, 관공과도 논쟁할 자격이 있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동강변의 을밀대로 가거라" 하더란다. 이윽고 꿈이 깨었다. 을밀대의 경치에 취해 오르던 그 이튿날의 산행에서, 선주는 우연히도 창일倉日 선생이라는 도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얻게된 그는 며칠 뒤 대성산 두타사에서 밤낮으로 주문을 송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정신을 주문에 집중하자, 마음에 서려 있던 잡념이 점차 사라지고 무아경에 이르게 되면서, 삼일 째에 이르자 접신이 되면서 몸이 떨리고 기력이 되살아나며 힘이 솟기 시작하였다. 선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창일 선생이 일러 준대로 7일의 정성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몸에 힘이 났다. 입맛이 되살아나고, 소화력이 왕성해 졌으며, 그 동안의 중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삶의 비결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쁨이 솟아올랐다. 이로써 선주는 선도仙道를 수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입산수도入山修道 선주는 그 이후 장 선생이란 도인으로부터 구령삼정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얻어 심산 유암에 들어가 몇십만 번을 외우고 또 외웠다. 몇 해 동안 육경신일六庚申日마다 밤을 새워 송독하였다. 선주는 19세 무렵부터의 관성교 연구에 이어서, 21세 무렵부터는 이처럼 입산 수련에 정력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번씩 심산 유벽 깊고 외진 산사에 가서 옥경玉經을 연구하고 주송하기를 21일, 혹은 49일, 혹은 백일을 지새웠다. 대성산의 두타사, 상원의 백운암 등이 그의 치성 제단이 세워지던 곳이었다. 선도의 수련 기도라는 것은 묵상과 송독을 겸한 것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행이었다. 이 기도는 신통력을 얻고 신통神通이 되어야 하므로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며, 사邪가 단 한 순간의 틈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예정한 기일 동안에 집중된 정신을 적은 틈이라도 해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과 낮을 불구하고 기도를 쉴 사이 없이 계속하며, 심신의 피로로 잠이 올 때는 삼동 대한을 가리지 않고, 반석 위에 서서 얼음물로 목욕하여 잠을 깨우기도 하고, 밀 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사이를 지지기도 하며 공부에 진력하였다. 이처럼 진력하는데, 방안에서 진동하는 옥 피리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며, 간혹 옆에서 총소리처럼 폭발하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도 공부가 무르익으며, 선주는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다. 예수교로의 전향 "삼령신군三靈神君이시여! 현 세계를 움직이는 예수교가 참 도道이오니까? 거짓이오니까? 밝히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교 전도지를 내미는 평양 거리에서 예수교인과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 있은 후, 이렇게 기도하기를 몇 날이 지나자, 자신이 신봉하던 선도를 영생불사 도리로 알고 있던 선주의 마음에 점차로 의심이 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환영이 보였다. "아래로는 만경창파요, 위로는 층암절벽이 솟았는데, 이편과 저편에 각기 동아줄이 드리워 있는지라, 내가 이편 줄을 잡고 오르는데 보아하니 위가 썩은 줄이로고. 하여서, 잡았던 줄을 놓고 저편의 것으로 옮겨가려 하니, 이제는 그 줄마저 튼튼한 것인가 의심이 먼저 나는지라..." 이제 다시 선주는 번민에 휩싸였다. 10여 년을 매진해 온 선도仙道에의 회의와 아울러, 예수교에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다시 그를 병고의 길로 내 몰았다. 이내 심신은 다시 쇠약해 갔다. 선주는 전도자가 주고 간 천로역정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그 책 중 인물의 역정에 자신의 지난 생이 투영되어 눈물이 책장을 적시었다. 그러나, 하나님에의 깨달음은 물론, 예수에 대한 조그마한 신뢰감마저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전도자가 다시 일러 준대로 선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천부天父를 상제上帝라 부르며, 깊은 밤이며 이른 새벽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상제님이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여러 해 정성을 다한 선도仙道는 이제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확신치 못하고 있사오니, 저는 실로 민망하여 죽을 지경이오니이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심령에 안식을 주시옵소서!" 이 같은 내용의 기도가 수삼일 지속되던 어느 날 밤, 오고가는 인적은 끊기고 사방은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선주는 홀로 꿇어 엎드려 간곡히, 예수가 과연 인류의 참 구주인지를 기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방안에서 예의 그 청아한 옥 피리 소리가 진동하며, 요란한 총소리가 사방을 뒤흔드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공중에서 "선주야, 선주야, 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음성에 놀라 두려움에 몸을 떨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엎드린 그 자세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입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 대곡하였다. 몸은 불덩이 마냥 펄펄 끓었고, 선주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해가 1897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기수 길선주 목사는 기미 만세 사건의 주역 33인 중 기독교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한 죄목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뒤, 얼마쯤 자택에서 휴양하고 다시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다. 목사는 가는 곳마다 말세학末世學을 강의하였다. 머지 않아 큰 전쟁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예고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의 되어감이나 세계 정세의 흐름이 심상치 아니했던 동시에, 세계적 전쟁과 재난이 임박해 오고 있던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세의 징조를 확연히 느끼게 하였다. 목사는 가는 곳마다 주님의 재림을 교회에 경고하였던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출옥 후 1935년 상반기까지는 평양을 중심 한 평안도 근방과 만주, 북간도 일대를 돌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사명에 불타는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아볼 여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복음을 온 국민에게 전하기에 정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가 전국을 돌며 행한 부흥회의 설교가 2만여 회를 넘었고, 청강자가 당시로 연 380만 명을 넘었다. 설교 메시지는 성서를 근거로 예언적이었으며 영감적이었고, 그가 길러낸 목사, 장로, 교사, 사회운동가가 800여명에 이르렀다. 세례를 직접 베푼 교인이 3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새로이 설립한 교회가 60여 곳에 이르렀다. 그러던 1935년 8월, 평안북도 신천군 신천면 월곡동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을 일으켜 강단에서 쓰러졌다. 신천 기독병원에서 13일간의 치료를 받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목사는 평서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뿌리치지 않았다.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임차면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마지막 날, 집회의 폐회 축도를 마친 그 자리에서 길선주 목사는 다시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날의 그 축도가 한국민족교회를 향해 기도하던 그의 마지막 기도가 되고 만 것이었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 종로서적'을 참조하라.) 3. 길선주의 영성사적 위치 한국적 성령운동의 전형 길선주 목사가 한국 민족교회 성령운동의 기수로 등장한 것은 1907년 평양에서의 대부흥회부터이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이래로 겨레는 나라의 역사가 잠시 끊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단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필연코 언젠가는 압제자가 심판의 검 앞에 굴복하고야 말 것이라는 신앙과 역사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적 신앙과 역사의식을 한국 민족교회에 절절히 심어간 이가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대부흥의 실질적 구형자構形者였고, 그 독특한 유형의 신앙을 형성해 나간 인물이었다. 새벽 기도회는 세계 교회사상 그가 한국에서 처음 실시하여 그 전형이 되게 하였고, 통성桶聲기도라 하여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의식儀式도 그가 창안하였다. 성령의 임재臨在하심에 대한 체험적 고백이나 그 정서적 표현에 감싸이는 신앙생활의 유형도 모두 실상 이때로부터 그 근원을 서려두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체험적 신앙과 함께, 길선주 목사와 그의 부흥회에는 성서와 교회사적 전통에 대한 신앙적 계승이 시종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그 스스로가 일만 여 회를 독파한 계시록 묵상과 아울러 성서 전반에 걸친 그의 피나는 숙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부흥회에서의 길선주 목사가 행한 설교가 넘치는 영력과 함께 퍼부어 놓는 성서 구절들이 줄줄이 구슬처럼 이어져 연결되게 하는 은혜로운 해석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부흥사경회 인도 중 쓰러진 그의 마지막 임종 길에 들려지던,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라는 찬송과 함께, 그의 운구가 마지막으로 장대재를 떠날 때 한 조객이 이런 글을 남긴 바가 있다. "선생이 나심에 근세조선에 위인이 있었고, 선생이 기독교회에 개종하심에 조선교회의 반석이 섰으며, 선생이 1906년 새벽기도를 시작하심에 세계에 새벽 기도가 시작되었고, 선생이 1907년 성신의 불을 드시매 (조선)천지에 대 부흥이 시작 되었다... 선생이 최초로 한인韓人 목사가 되시매 조선에 노회老會가 조직되었고, 선생이 계시록을 일만독一萬讀하시매 무궁세계의 길이 만인 앞에 밝아 지도다... 선생의 손에 직접 세례 받은 자 삼천 인 이상이요, 구도자가 칠만 인이라 하니, 기실은 사십만 조선교인 중에 선생의 감화 받지 않은 자 심히 적고 적으리라." 길선주의 말세학 길선주의 사상은 종말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사상적 근거는 요한계시록과 요한서신들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의 신비주의가 그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소망의 소재를 먼 미래에 두고,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不遠하니, 저 천국 얻을 자 회개하라'는 찬송이 영가靈歌처럼 늘 울려 퍼져 나오던 독특한 그의 심령부흥회는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던 시대의 갈망에 응답하여 그 맡은 바 소임을 훌륭히 다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종말론은 현 질서에 대한 부정적 자세이기는 했지만, 계시록의 천년왕국을 저 앞에 있는 인류의 다가올 발전적 미래의 낙원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사상적 의미를 갖는다. 바로 지상천국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지상적 실현을 선뜻 믿었다. 선도仙道에 있었던 지난 역정에 힘입어 그가 성서에서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상체계를 두고 당시의 한 저명한 학자는 조선신학朝鮮神學이라 명명한 바도 있다. 길선주의 이러한 신앙적 현세성現世性이 그의 위대함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신앙 속에 은둔과 피안성彼岸性을 그 전통으로 물려준 것이 분명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살아있는 겨레와의 동행에서 증거 되는 것이었고, 역사 속에서야 비로소 선교될 수 있는 성육적成肉的 사건인 것이었다. 교회와 사회를 연결시키고, 범인凡人이 찾는 열락悅樂을 성령의 사랑으로 채워 가는, 민족과 대중의 신앙 바로 그것이 길선주 목사가 부흥회에서 선포하고 간 신앙이었다. 3. l 운동의 민족 대표로서,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 부흥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사실상 한국교회 일대一代의 기록이었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그의 활동과 서거를 계기로 해서 새로운 전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4. 길선주의 영성적 후예들 불의 사역자 김익두 김익두金益斗 목사는 길선주 이후의 한국교회 부흥회를 대명代名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27세 무렵의 1900년에 기독교로 전향했고, 1902년 세례식에 임하기까지 신약성서를 일백독一白讀해낸, 열정과 기도의 소박한 전형적 한국 기독교인이었다. '가슴을 칼로 찢는 듯한' 성령 체험을 경험하고 나서, 불같은 성령의 임재와 기적의 신유神癒 은사를 가져오는 부흥 목사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게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사경회 때부터다. 그때 박수진朴守眞이란 이름의 아래턱이 떨어져 늘어진 희대의 불구자가 그의 기도의 능력으로 고침 받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919년의 조선! 심각한 민족적 좌절의 아픔과 몰려드는 세속문명의 도덕적 황잡, 혁신적 기풍으로 휩쓸려 넘치던 사회주의 무신론적 투쟁 분위기 등에 동요되는 신앙적 혼돈은 겉잡을 수 없었다. 그날에 목사 김익두가 길선주에 이어 거인처럼 한국 강산을 짊어지고 지켜 선 것이다. 기미 만세의거 이후에 김익두의 부흥회가 없었더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사명을 짊어지고 나선 한국교회 전환기의 인도자였다. 그의 이적은 이후 계속되었다. 풍증風症, 혈루증血漏症, 고령의 반신불수, 어린 꼬마 앉은뱅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신유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교계에서는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결성하여, 그의 신유의 능력을 검증해 나가기까지도 하였고, 장로교 황해노회에서는 장로회 헌법 제 3장 1조 문항, '현하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노라.'라는 조문을 수정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1923년 총회에서 수락하기에 이른 일도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신앙에 대한 한 지향의 표시였다. 그는 영적 사랑과 함께 교회의 사랑을 강조하였고, 성신의 능력과 기도의 힘, 그리고 소박한 신앙과 역경 후엔 반드시 복락이 따라온다는 복음을 계속 전하고 전하였다. 1919년 이후 몰아닥친 도전에 대하여, 교회는 이런 형식으로 대응해 나가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부흥사경회적 신앙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1926년 이후의 교회 안팎에서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배척은 1926년 이후 공산주의 계열의 표면적인 반反기독교 운동 전략 체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몇 가지 예로, 간도 용정龍井에서의 집회에선 폭도들이 철근을 휘두르며 가하는 공격을 받아 예배가 중단된 일이 있었고, 그해 5월 전북 이리裡里 집회에선 민중 운동가들의 연명으로 발생한 반종교적 시위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김익두 목사가 특히 사회주의 계열에게 배척과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성장 배경과 메시지에 있었다. 교육적 배경이 별로 없이 저자 거리의 한량과 같은 생활에 젖기도 했던 그는 한촌 유벽지 출생이었다. 그러한 김익두 목사가 한국교회로서는 일찍이 접근하지 못해내던 빈곤과 병고 무뢰無賴의 소외 계층을 흡수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이들 소외계층 특유의 사회적 정서, 다시 말하자면 겸손, 양보, 가난, 정서적 소박성 등 이러한 생태를 찬양하면서, 부富에의 경원과 현 질서의 종말을 심판적으로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천년왕국적 종말론은 현실의 죄악성에 대한 단죄 때문에 빈곤과 멸시의 소외 계층에게 환영받았고, 더욱이 그의 설교 언어형태와 구성 역시 이들과의 동질적인 삶의 체험에 힘입어 그 호소력이 매우 강했으며 따라서 수용적受容的일 수 있었다.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성령 강림 체험으로의 그의 인도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약속해 줄 수 있었고, 그래서 기존 사회적 불균형에 대한 저항의식을 신앙에의 몰입으로 전환시켜낼 수 있게 해주었다. 분명 목사 김익두의 메시지는 길선주와는 달리 내세 지향적이었다. 바로 이것이 민중의 긍지 확보에의 길을 열어주는 채널이 되었고, 이는 동시에 민중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와의 결별에 필지必至하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공산주의 계열이 그에게 거세게 반발하게 되었던 주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최후의 충성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유일하신 하나님에의 신앙은 일제의 천황 숭배에의 항거를 함축하고 있었고, 또 새로운 신앙적 사회 혁명을 불러오는 신비적 종파의식이 발아할 수 있는 양분이 되고 있기도 하였다. 시련과 오해 속에서도 이렇듯 성령의 불길을 좌절되고 혼미해 있던 군상들에게 일으켜주던 목사 김익두의 부흥회가 멈칫한 1930년대, 그 자리를 경건의 새 박력과 영감의 능력으로 채워간 성도가 하나 있었으니 이용도李龍道가 바로 그 사람이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를 참조하라.) 일사각오의 주기철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유명한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교회의 투쟁에 있어 그 대표적 선봉으로서 유명하다. 17세 무렵엔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 상과대 재학 중 병고로 휴학,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1920년 9월, 바로 김익두 목사가 인도한 마산 문창교회 사경회에서 큰 은혜와 감화를 얻고, 이어 동년 11월, 역시 김익두 목사의 창원 웅천읍교회 집회에서 마침내 결단하여 신학을 결심하고 주의 길로 매진하게 된 인물이다. 그후 부산의 초량교회와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각각 5년여씩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성공적인 목회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으나, 그가 정작 한국교회의 전면에 선봉적 투사로서 등장하게 된 기간은 신사참배 강요의 파도가 거세게 한국교회를 뒤엎어 질식시키려하던 무렵, 바로 1936년도부터 1944년 그가 감옥에서 순교하기까지의 평양 산정현교회 목회 시절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교회의 교세가 대단하여 주일날엔 거의가 상가의 문을 내렸고, 교회 종소리가 동서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러한 제 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던 평양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는 바로 길선주 목사가 시무한 장대현교회였고, 구역이 많고 경제적 기반이 든든하며 민족주의 지사들이 많이 운집해 있기로는 의당 산정현교회였다. 산정현에는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되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장로로 봉직하고 있었으며, 재력 있고 기개 있는 장로들이 기라성같이 자리잡고 있어 가히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회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 교회에 1936년 40세의 주기철이 당회장 목사로 들어선 것이다. 두 해를 넘긴 1938년 2월 총독부는 신사참배 강요를 위한 첫 타격 목표를 전국에서 교세가 제일 강하기로 유명한 평북노회에 두고 총공세를 펴왔다. 결국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고, 연이어 평양신학교가 폐교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한국교회의 어두움에의 침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1938년 6월, 시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매우 암담하였다. 전국 24개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노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한 종말의식이 주기철 목사의 생각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그는 사태의 진전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게 보이자, 이제 비로소 주의 제단에 몸을 바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다음은 그의 일지에 보이는 필적 유고의 일부분이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했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외다. 1939년 3월 제 74회 일본제국의회는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켜 조선교회를 지배하는 일에 법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과거에도 올가미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제 떳떳이 식민지교회를 지배하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게된 것이 그들의 큰 위세였다. 이에 일경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라는 친일단체를 조직, 조종하기로 모의하는 등 조선에 대한 정신적 지배의 마수를 펼쳐오고 있었다. 이는 신사참배 가결에 버금가는 중차대한 사건으로, 만의 하나 부결되기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큰 암적 존재가 있었으니, 조만식, 김도원, 오윤선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비호하고 있는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였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네. 일제당국도 속수무책이었다. 고문으로도 설득으로도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놈은 감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놈이로구나!"라고 결론을 내리고, 석방과 재 구속을 반복하던 중 1940년 제 5차 구속을 집행하였다. 연행되기 직전 주목사는 몸져누우신 어머니께 큰절을 하였다. "하나님께 어머님을 부탁드렸습니다." 그의 최후 고별 인사는 이 한마디였다. 이에 앞서 주목사는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한 평양노회가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한 소식을 듣고, 이렇게 변모해 버린 조선교회의 모습에 찢어지는 가슴으로 목이 메었다. "사람에게 쓸려 버리우는 예수님의 고독한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이 핏자국에 엎디어 우리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합니다." 마침내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문을 4년에 걸쳐 계속 받아내던 중, 그 인내의 지구력이 육신의 나약으로 무너질세라, "순교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다가 1944년 4월 22일 옥중순교의 숨을 거두었다. "내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누군가가 그의 마지막 기도를 들었다. (김요나의 '일사각오, 한국교회 뿌리찾기선교회'를 참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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