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사상(2)
2007-10-25 19:27:45

② 성 보나벤투라

성 보나벤투라 (St. Bonaventura, 1221-1274)로 알려진 조반느 피단자 (Giovanne Fidanza)는 1221년에 토스카나의 바뇨레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병을 얻어 그의 어머니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를 바친 결과 회복되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으나 입회의 연월일은 정화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1240년 전후일 것이다.

어쨌든 보나벤투라는 그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음에 틀림없으며 1245년에 사망한 알렉산더 할레시우스에게 파리대학에서 배웠고 그곳에서 인문과학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성 보나벤투라는 성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수도 사제와 세속 사제간의 다툼에 말려들어 1255년에 대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즉 그는 박사 자격과 대학 교수단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1256년에 그를 다시 인정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는 아퀴나스와 함께 1257년 10월에 교황의 조정에 의해서 승인을 받았다.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대학의 신학 교수였으며 그는 틀림없이 교수직을 계속 수행했을 것이다. 1265년 보나벤투라는 교황을 설득하여 요크 대교구로의 임명을 철회하는 데 성공했으나 1273년에는 알바노의 주교 및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274년에 그는 리용 공의회에 출석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재 일치를 역설했으나 공의화가 끝날 무렵에 그는 세상을 떠나서(1274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참석한 가운데 리옹에 묻혔다.

그의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라틴말로 옮겨지고 아라비아의 주석서들이 유입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토마스와 달리 독자적인 노선으로 이를 종합하려 했다. 그에게 철학은 탐구의 대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며, 신학은 믿음의 대상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이성의 세계가 있고, 신앙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탐구하고 조사하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성은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마저도 탐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은 그 한계가 있으며 이는 종교적인 진리까지 회의하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자신의 능력을 절대시할 위험이 있다. 이성이 무엇이든지 탐구하는 것이나 그가 신앙이 아닌 독자적인 것으로 종교적인 것을 결론할 때 이는 위험성과 비극성을 가진다. 이것이 이성에 의한 철학의 한계이다.

신학은 믿어야할 것을 다룸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추론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은 교리와 계시를 연구하는데 이성을 필요로 한다. 이성도 신앙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을 선호한다. 그것은 그가 몸담은 수도원의 영향이기도 하겠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여러 면에서 성서와 조화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한 신학자나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그저 자연학자라 보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을 선호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것을 탐구하는 자연학자이지만 플라톤은 천상의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도 신앙의 빛을 가지지 않았기에 한계를 가진다. 그는 이성이 신앙의 도움으로 천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이야기한다 우선 물질계를 보고 그로부터 하느님의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물질계 안에 신의 본질과 힘을 고찰한다. 이로서 물질계 내부에도 신의 발자취가 있음을 느낀다. 다음으로 영혼의 정신적인 능력을 고찰함으로 신의 모상임을 알고 나서 영혼의 내면에 대한 반성하고 존재의 이념에 도달하여 모든 사물이 왜 있는지 그 근거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신을 향한 위계 속에서 다루려는 것이다. 즉 물질계에서 천상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는 이성의 도움으로 신앙이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③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스콜라철학자로 간주되는 이로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 이후 세대의 사고에 그의 저작이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가톨릭 철학자들 중에서 그의 저작은 가장 높이 평가되어 왔고 일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비가틀릭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서양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부류에 들어간다.

많은 철학자 그리하듯이 그도 생년일에 대한 그리고 출생장소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구하기는 어려운 사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적하여 볼 수 있다. 그는 1225년 록은1226년 아퀴노의 백작 아들로 태어났으며, 수 많은 중세 근대 철학자들과 같이 그도 수도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5살에 몬테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공부하였고, 1239년부터 1243년까지 나폴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때 그는 그리스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가지는 데그 것은 히베르니아의 페트루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를 쓰기도 한 이를 스승으로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도미니코회에 입회한다. 그러나 고위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그를 그의 집안에서는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고위성직자가 들 수 있는 몬테카지노수도회에 입회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것이 뜻 대로 되지 않자 토마스를 납치하여 성에 강금하고 많은 유혹으로 유입하려하나 그는 결국 도미니코회에 입회한다. 1245년에서 1248년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의 위대한 스승인 알베르투스를 만난다.

그에 의하여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의 연결에 도움을 받았으리라. 그는 1252년에서 1255년 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명제집을 강의하였다. 그 당시 그곳에는 보나벤트라도 강의를 하였다. 그는 1259년 파리를 떠나고 1268년 교황청 소속 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당시 위대한 번역가인 뫼르베궤의 월헴을 만나고 그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클로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 또한 여러 주석서도 알게 되었다.

1269년에서 1272년까지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베로에스파와 논쟁을 벌린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인다. 1272년 수도원 학교와 나폴리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그리고 리옹 공의회에 가던 도중 죽음을 맞이한다. 그날이 1274년 3월 7일이다.

그는 보편적 박사라 불리게 되었고 천사적 박사라 불리게도 되었다. 그리고 1323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879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이 되었다. 그는 성서주해를 비롯하여 신학대전 그리고 철학대전이라 불리는 반이교도 대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 등을 남겼다.

토마스에 이르러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유럽에 전하여 지고 금서로 지정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신앙을 희생시킬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토마스는 이러한 대립의 상황에서 이를 조화로이 발전시킨다.

마그누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최근의 아랍과 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당시 보수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그들이 의심하는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랍인 주석가들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가치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석서들을 썼다. 아퀴나스의 철학 견해는 그의 신학저작들, 특히 <신학 대전) (1265/66-73)· (이교도에 대한 반론>(1258-64) 속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작들 속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과 방법을 구분했다. 철학자는 감각이 제공한 자료를 가지고 시작하여 사물의 제일원인을 찾는다. 신학자의 탐구주제는 신성한 성서 속에 계시되는 있는 신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보다는 못하지만 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유용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상들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을 변형하고 심화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부동의 동자가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받아들였으나, 그가 도달한 제일 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매우 달랐다. 그 원동자는 사실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이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조화시킴으로써 그 교리의 명예를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교정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철학원리, 특히 존재개념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룩했다.

그는 존재를 현실태로 생각했다. 그에게 신은 순수존재 또는 현실태이다. 창조물은 그 본질에 따라 존재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나 본질이 허용하는 정도로만 존재 또는 현실태에 관여한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기본적 차이는 창조물이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혼합에 의해 구성되지만 신의 본질은 바로 신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8. 중세 후기의 철학자

중세 후기에도 이전의 철학하는 방식들이 계속되었고 특정의 사상학파들로 형성되었다. 도미니코스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를 항상 엄격하게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주의가 공식 가르침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중세 후기 내내 토마스주의와 경쟁한 새로운 양식의 신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①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Johannes, 1266~1308)는 스코틀랜드의 록스버러 지방의 막스톤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둔스는 버위크의 한 지방으로부터 유래한다. 그가 스코틀랜드인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시대에 이미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은 구별없이 '스코티 '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신빙성에 있어서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련의 기록을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만 생년월일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1265년 또는 1266년에 태어나서 1278년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서는 1280년에 수련기를 마치고 1291년에 사제로 서품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308년 11월 8일에 사망한 컷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쾰른에서 사망하여 이 도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의 교회에 안장되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대표하여 토마스 학파와 대립하였다. 성찬론에서는 철저히 화체설을 주장했는데, 그의 사상은 프란체스코회를 중심으로 한 사상가들에게 스코투스주의로 이어졌다.

스코투스주의는 사물의 전체성을 직관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사유, 즉 이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주장한다. 또 모든 것은 신의 자유이며 한없는 사랑의 발로로서, 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가 선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면밀한 사변 때문에' 정묘한 박사' 로 불릴 정도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으나, 그의 비판적 역사 전승적 연구결과가 정당한 평가를 낳았다. 저서에 <옥스포드강화집>등이 있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철학이 인간의 지식욕을 채우기에 충분하고 적합하다는 이성주의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순수 철학자는 인간의 타락과 은총·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진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둔스 스코투스가 보기에 우주의 제일 원동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은 그의 철학의 뚜렷한 한계였다.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제일 원동자나 존재 자체라는 개념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완전한 개념이었다. 스코투스의 철학은 성 보나벤투라, 특히 성 토마스의 철학이 그 증거가 되는 세기 즉 13세기에 속하지만, 비판적인 측면과 主意주의적인 요소에서-主意주의적인 요소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프란치스코 외적 전통과 결합해 있기는 하지만-볼 때의 스코투스 철학은 14세기를 예시하고 있다.

변증론적인 솜씨와 신중하고 끈기 있는 사색의 대가인 스코투스 철학은 비록 전통이 침투되어 있지만 설득력 있고 박력있는 독창적인 사상가, 즉 현실적으로는 '교조주의적 철학'의 종말기에 속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운동의 선구자였다.

2. 월리엄 오캄 (William Ockham)

철학적 학설로서의 유명론은 로스켈리누스에 의하여 일찍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실념론만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는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비난과 거부를 받았다. 의지의 우위를 강조했던 둔스 스코투스에 뒤이어 유명론은 월리엄 오컴 (William Ockham, 1280-1349년경)에 의하여 부활되고 더욱 완전한 발전을 보았다.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그의 입장은 유명론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으로, 개체가 실재이고,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에 관하여 술어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14세기 후반에는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를 '낡은 방식 '의 철학이라고 불렀고, 반면 오캄 등이 시작한 철학을 '현대 방식 '이라 여겼다. 오캄은 그리스-철학의 숙명론에 맞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며 창조물은 우연적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신의 자유는 창조의 긍정적 모형으로서 신의 이데아가 있다는 점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와 반대로 신은 창조할 때 미리 생각해둔 이데아를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창조물들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 실재는 없고 개별 사물만 논을 뿐이다. 오캄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 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은 열을 내지만 차가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또 도덕 질서도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인간에 대한 미움을 가치는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데 인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캄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의 존재를 확립할 때처럼 개연적 논증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신앙만이 이 문제와 그 밖의 중요한 문제에 확실성을 제공한다. 오캄이 내놓은 또 하나의 원리는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이 사유의 경제성 원리는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 불린다.

9. 소수에 의한 철학

중세 유럽에 살았던 유태인들과 이교도들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집단이었다. 유럽사회에 동화되기 어려웠던 유태인들은 중세 유럽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도시로부터 추방되거나 학살되기도 하였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의 철학은 과연 중세유럽 철학과의 연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글을 보면 잠깐 언급하고 지나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라비아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구로 완전하게 도입되었던 주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 반하여 유태 철학은 확실히 그 기원을다른 민족과의 문화 교섭에 두고 있다. 이들 두 철학은 서양 중세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① 아라비아 철학

모하메드가 622년에 메카를 떠날 때부터 그의 지도력 아래서 시작되어 그 이후 남유럽 대부분에 걸쳐 퍼져 나갔던 거대한 모하메드의 왕국은 주요한 철학 활동들이 펼쳐질 학문의중심지를 세워야 할 책임을 안고 있었다. 이 중심지 중의 하나는 페르시아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에 위치해 있었다. 연구는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이루어졌고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특정한 분야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습득한 것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역서들은 이슬람 신앙과 관계된 그들의 철학에 대한 주석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스콜라철학의 발전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 이슬람 철학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철학과 관련되어 있지만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고대 철학자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한 것은 시리아의 그리스도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슬람 철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 철학은 동방과 서방의 두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동방의 그룹에서 대표적 인물은 아비세나이고 서방의 그룹에서 대표적 인물은 아베로에스이다.

1. 아비세나

스콜라철학 체계의 참다운 창조자는 아비세나 즉 이븐 시나 (Ibn Sina, 980-1037년)일 것이다. 그는 부하라 근교에서 태어난 페르시아인으로서 아라비아어로 교육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방대한 저작의 대부분은 아라비아어로 저술되었다. 조숙한 소년이었던 그는 코란, 아라비아 문학, 기하학, 법률학, 그리고 논리학을 잇달아 배웠다. 그는 스승을 앞질러서 스스로 신학, 자연학, 수학, 의학을 연구하여 17세에 이미 의사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회교국 군주의 고관을 지내고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이 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철학자로서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비세나의 사상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위한 예비학인 논리학, 사변철학 (자연학, 수학, 신학), 실천 철학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분류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제 1신학 (존재론과 자연신학에 상응한다)과 제 2신학 (이슬람교의 주제를 포함한다)으로 구분하고 이슬람 신학을 그리스 신학으로부터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특색은 아비세나가 이전의 철학자들로부터 아무리 많은 것을 빌었을지라도 자기 자신의 체계를 신중하게, 또 자주적으로 생각해 내어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체계로 이루어 내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2. 아베로에스

아베로에스, 즉 이븐 루슈드(Ibn Rusd, l126-l198)는 1126년에 스페인 고르도바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 법률학, 의학, 수학, 철학을 배운 그는 처음에는 세빌랴에서 다음에는 고르도바에서 법관을 지내고 1182년에는 칼리프의 시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제2대 칼리프 만수르의 냉대를 받고 궁정에서 추방되었으나 후에 모로코로 건너가서 1198년에 거기서 죽었다.

아비세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수학, 의학, 법학 및 신학 분야에 정통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학자였다. 그 또한 아라비아어로 저술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으며 가능한 한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이러한 목표들을 향하여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번역하고 그 저작들에 대한 많은 주석서들을 서술하여 때로 주석가로 불리었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의 교리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아베로에스는 신 존재에 대해서 아비세나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는 아비세나의 영원한 창조라는 생각을 부인하였다. 실제로 그는 어떠한 종류의 창조에 대해서도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엿다. 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직 창조되지 않았으며 우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이중진리설(Double Trouth)'라고 알려진 그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코란의 가르침을 만족하게 답하지 못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코란의 가르침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상반되어도 코란이 틀 린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베로에스에게서 신학과 철학의 진리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유태철학

유태철학은 고대에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그리고 중세에는 아라비아 철학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성장하였다. 유태철학은 사실 유태지방이 아닌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언어에 있어서도 영향에 따라 고대에는 그리스어 그리고 중세에는 아라비아어로 저술되었고 1200년에 이르러 비로소 히브리어로 저술되었다.

* 마이모니데스

중세의 유태 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를 끄는 사람은 모세르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 l135-1204)는 아베로에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역시 코르도바 태생이다. 그는 1204년에 카이로에서 죽었는데 무어 사람들이 지배하는 스페인은 이미 철학자들에게 적합한 곳이 못 되었으므로 그는 그 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의 지식은 주로 아라비아 철학자들로부터 획득된 것이다 그는 유태교적 배경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기록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길 잃은 자를 위한 지침>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저술한 책은 유태교를 통상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명백한 모순 점들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난점들이 언어가 사용되어온 방식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생각에 철학은 성서에 담긴 진리를 파악하는데 거침돌이 아닌 보조자이다. 그러나 그는 성서가 철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한다. 예언자를 제외하고 그가 인가 지력의 최고 모범으로 존경했던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마이모니데스는 알파라비와 아비세나의 자연 신학에 어느 정도 의거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피조물로부터 제1원인으로서의 하느님을 논증했다.

그는 이들 논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 가운데 있는 알에 의해서 입증했다. 그러나 비록 마이모니데스가 후에 성 토마스에 의해서 주어진 증명 형식 가운데 대부분을 앞질러 말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는 성 토마스보다도 하느님에게는 적극적인 술어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적합한 어떠한 적극적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

물론 성 토마스도 이를 인정했겠지만 마이모니데스는 오히려 <부정적인 길>을 더욱더 역설했다. 모세즈 마이모니데스는 그리스 철학과 유태 정통 신앙을 조화시키는 점에서 아비세브보다는 성공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영향이 아비세브의 철학에서보다도 마이모디네스의 철학에서 더 현저하다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III. 결론

중세철학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세기의 철학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러한 답을 요구하는 그런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다.

중세철학은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진정한 중세철학은 스콜라철학이며, 그것의 준비기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교부철학이다. 교부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도 신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참으로 그것이 활발했던 알렉산드리아는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고향이기도하다. 신플라톤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새롭게 된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말고도 다른 이들도 신플라톤주의로 그리스도교의 계시신학을 체계화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졌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저서인 '삼위일체론'의 기본을 이룬다 이 당시 떼르툴리아누스는 철학을 반대하고 신앙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은 중세기에 이르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그것은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스콜라철학이다.

그들은 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체계화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디인 제일 원동자를 신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이 이성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신은 무엇이라 할 수도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도 모른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성을 인정하며 신앙을 인구축한 것이다. 이성으로 신의 지식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등장하며.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즉 철학은 신학을 체계화하는 하나의 수단이 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그들이 수행한 활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도 신비주의로 이어진다. 마이스터 엑하르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세기 마지막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부활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르네상스철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간단히 살펴본 중세철학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여기에서 사용되어진 많은 철학의 용어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사용되어지며, 그들의 저술을 연구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 역사는 중세철학을 중요시 하지 않고 신학의 시녀라는 말을 쓰며 등한시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중세 천년의 우여곡절을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며 중세의 쇠퇴기 이후, 과학혁명 이후 인류가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 인해 중세 철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과거를 회상할 때 지금에 와서 중세철학에 대해 돌아본다는 것은 먼지나는 버스를 힘들게 쫓아가서 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지만 이러한 중세철학을 되돌아 되돌아봄으로서 근세로 이어져 현재에 이어진 사상을 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Reference>

로베르 들로르, '서양중세의 삶과 생활', 새미, 1999

앤터니 케니, '아퀴나스', 시공사, 2000

크리스토퍼 도슨, '중세 유럽의 형성', 형설출판사, 1983

F.코플스톤, '중세철학사', 서광사, 1962.

박우석, '중세철학의 유혹', 철학과 현실사, 1997

C.H.패터슨, '중세철학입문', 이문출판사, 1994.

www.yahoo.com/Arts/philosophy/western_Philosopy/

www.mahan.wonkwang.ac.kr /med1ink/theophi1. htm

www.poori.net/eth41-2.htm

wwu.poori,net/etHl-02.htm

www.home. pusan.ac.kr /~ksj oo/_5/antimi.htm

www. sogang.ac.kr /~donbosco/research/18cosmos982.htm

www.phil.snu.ac.kr/source/westphi1/middle.htm

www.home.pusan.ac.kr/~ksjoo/link/main.htm



admin

이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