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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십자군 2007-10-25 19:08:31 중세의 십자군 (십자군 전쟁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의의를 중심으로)
I. 서론 Ⅱ 본론 1. 십자군 전쟁의 배경 2.십자군 전쟁의 경과 3.십자군 원정의 결과 Ⅲ 결론 - 십자군 전쟁의 의의 ◇참고문헌◇ .
Ⅰ.서론 서양의 중세시대를 보면, 장원제와 기독교문화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로 버티고 있었지만, 정신적 문화적으로는 기독교 문화가 그 버팀목을 대신하고 있었다. 유럽은 1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9세기에 격심했던 노르만, 마자르 및 사라센의 침입도 점차로 진정되고, 장원제도를 바탕으로 한 봉건사회도 나름대로 틀이 잡혀서 발전을 하게 되었다. 10세기로부터 11세기 전반기에 걸친 사회의 전반적인 안정과 봉건사회의 발전은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고, 도처에서 개척과 개간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규모는 작지만 잉여농산물의 처리를 위한 지방단위의 시장이 생기고, 이와 더불어 교환경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도시가 싹트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세기에는 유럽 전체에 새로운 활기가 감돌고 넘쳐 흐르게 되었다. 11세기 이전가지의 상 황을 볼 때 유럽세계는 비잔틴세계나 이슬람 세계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훨씬 뒤떨어져 있었고, 특히 민족이동기나 그 직후의 혼란과 무질서상태는 이를 '암흑시대'라고 불러 마땅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암혹시대애 결정적으로 빛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바로 '십자군'이었다. 11세기 이후로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새로운 활기는 11세기말 십자군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십자군 운동을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방의 이슬람세계와의 대립이 낳은 서양중세의 최대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많은 변질을 초래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같이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십자군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십자군 전쟁의 경과는 어떠했으며, 십자군 전쟁의 결과 및 의의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Ⅱ 본론 1. 십자군 전쟁의 배경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며, 각 나라나 각 계층, 또는 각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1) 십자군의 원정의 원인 이슬람 세계와 크리스트교 세계는 이미 7세기부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처음 1,2 백년 동안은 이슬람 세계의 세력이 강하였으나 11세기부터는 서유럽 세계에 봉건제도가 성립되고 교황의 권위가 향상되었으며, 독일 ·프랑스·영국 등의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서유럽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카톨릭교회의 지배하에 안정을 되찾고 그와 더불어 경제적 기반도 마련되어, 서유럽 세계는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11세기 중엽부터는 수많은 크리스트 교도가 개인 또는 단체로 성지 순례에 나섰다. 이 같은 이유로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 사이에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습관이 생겨나게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예루살렘 성묘의 순례를 최대의 덕행으로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동반의 진화를 가져가서 팔아 얻는 경제적 이익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순례자는 날로 성행되었다. 사라센인은 처음 순례자를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차츰 동방 무역의 독점을 꾀하고자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셀주크 투르크인은 소아시아로 진출하여 동로마군과 싸워 콘스탄 티노플(=이스탄불)을 위협하고 다시 팔레스티나에 침입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1071) 순례자를 더욱 박해하여 기독교도의 격분을 샀다. 그런데도 셀주크투르크 는 서쪽으로 원정을 계속하여,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비잔틴황제였다. 2)직접적 원인 십자군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내누스가 지원을 호소한데 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셀주크투르크의 서쪽 원정으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위협당하자 황제 알렉시우스 콤내누스(Alexius Comnenus)가 로마교황 우르반 2세(Urban)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사실 알렉시우스는 얼마전 투르크 족에게 빼앗긴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유럽으로부터 얼마간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하여 교황인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우르반 2세는 이러한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성지탈환의 성전을 일으킴으로써 동서로 갈라진 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열어 성지회복을 위한 성전을 일으일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많은 군중과 기사들이 교황의 성전호소에 호응하여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그후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3)구체적 원인 ①. 교황의 동기 ⓐ.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교회로 통합 우르반 2세가 성지 십자군 운동을 전개시킨 것의 목적 중 한가지가 바로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자원군을 동방에 파병함으로써 우르반 2세는 비잔틴인으로 한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 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 군주 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 올 수 있었다. ⓑ. 독일 황제의 배제 다른 동기중 하나는 바로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 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반2세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 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학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 우르반2세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 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르반2세는 제 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 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하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하였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 운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반2세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 우르반2세에겐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의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그 이하를 의미하 는 것일 수는 없었다. ②. 경제정치적인 원인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고 8개월 후인 1095년 11월에 우르반2세가 프랑스의 클레르몽 시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하였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휠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국왕, 재후 기사들은 물론 일반 빈민층까지 적극적인 호응을 한 이유는 이들 모두가 각기 목적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귀족들은 정치가 점차 안정되어 가자 '장자 상속제'를 널리 수용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때까지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는 서유럽 내에서의 국지 전쟁을 통하여 재산을 모으거나, 최소한 작은 땅이나마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형제들의 수가 많아지고, 수명도 길어졌으며, 전쟁은 점차 줄어들었고, 장자만이 부친의 토지를 상속받게 되자 토지가 과다하게 부족하게 되었고, 이 같은 토지의 부족으로 인해서 귀족들은 분배받을 또는 독차지할 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제노아나 베니스같은 해상도시들의 상인들은 우선 지중해에서 모슬렘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코자 하였다. 또한 십자군에 가담한 반민 중 많은 사람들은 1095년 당시 인구가 과밀했던 지역의 출신자들이었다. 이들 십자군은 인구가 조밀한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이같이 각각의 계층들은 각각의 경제적 이유, 또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서 십자군에 그처럼 열렬한 호응을 보낸 것이다. ③종교적 이유 위와 같은 경제적·정치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제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사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 보아도 십자군의 참여는 잘 해야 소득 없는 귀환이요, 대개는 무슬림의 손에 목숨이나 잃기 쉽상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참여는 기독교인의 영혼에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여러세기에 걸쳐 순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행해지던 고해 방식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립고 효과 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 최고의 성지를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무장 전투는 단연 최대의 영적보상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우르반 2세 역시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에 참가자 전원에게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모든 고해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황의 약속이 있은 후로 십자군 설교자들은 우르반2세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더욱 큰 약속을 하고 말았다. 대사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의 참가자 전원에게는 내세에서 연옥의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참가 도중 사망한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으며, 그것을 얻고자 군중은 쇄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2.십자군 전쟁의 경과 ① 십자군의 선발대(민중의 십자군) 1096년 출발.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은둔자 베드로였다. 그는 성지순례를 갔다가 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구라파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설교를 했다. 그는 남프랑스, 스페인, 로레인, 라인강 지역가지 나귀를 타고 맨발로 다니며 설교를 했는데 이 같은 감동적 연설에 고무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인강 유역에 가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 했다. 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가? 왜냐하면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빛진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죄없는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이다. 이것은 반셈족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민중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갸 이슬람에게 전멸당하고 은둔자 베드로만 살아 돌아오게 된다. ② 제1차 십자군 운동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의 귀족들이 참여했다. 3개의 부대가 개별적으로 진군을 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십자군의 도덕적 영웅이었던 Godfrey였다. 이 십자군은 8차례의 십자군 가운데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거룩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운동에 참여했던 운동이었다. 이 같은 거룩한 신앙심으로 뭉친 제1차 십자군들은 1096년 겨울에서 1097년 봄까지 이슬람에 도착했다. 십자군 전설에 의하면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67만명, 기사만 17만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타이어니의 책에 보면 실제로는 8천에서 만2천명 정도 그리고 기사는 3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 동방의 황제가 원한 것은 원병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와서 자신을 도와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의 목적은 단순히 동로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므로 동로마 황제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제 1차 십자군들은 1097년 5월 니케아를 점령하고, 10월에는 안디옥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디옥에 이르러서는 8개월 정도 고생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고생 끝에 마침내 1098년 6월에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이슬람의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성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1099년 예루 살렘에 도착해서, 1099련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람들이 점령한 다음에 이곳에 라틴왕국을 건설했다. 고드프리가 성묘의 수호자가 되었다. 고드프리가 1100년 죽은 다음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서방과 같은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 종교도 라틴의식으로 재조정되었고, 많은 수도원들이 생겼다. 라틴 제국이 생길 때 처음에는 이 왕국의 실권은 대제후의 모임이 대궁정(High Court)에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모르가 왕위에 오른뒤 왕권을 강화하고 대제후들의 권한을 약화시켰으며 라틴왕국의 보호를 위해서 기사종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i )성전 기사 수도단 : 시토회를 모방하고, 불신자와 싸우고,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것를 목적으로 삼았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땅을 기증해서 성전 기사 수도단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ii)성 요한의 병원 수도단 : 세례요한의 교회부근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을 진료하고 구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iii)독일 기사단 : 나중에 프로이센을 점령한 아주 악명 높은 기사단이었다. ③제 2차 십자군 운동 제2차 원정(1147-1149)은 예루살렘왕국이 터키의 공격을 받자 신성로마황제인 콘라드 3세와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연합하여 일으켰으나 그 주력부대는 소아시아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잔여부대와 다마스커스 공략도 성공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1187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잃을 수 밖에 없었다. ④제3차 십자군 운동 제3차 원정(1187-1192)은 터키령의 이집트제후인 사라딘이 예루살렘왕국을 멸함으로써 영,독,불의 군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전쟁이다. 이 때문에 이 십자군 원정을 '왕들의 십자군'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같이 군주들로 구성된 최강의 원정군도 내분으로 성지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겨우 영국의 사자왕인 리처드 1세만이 예루살렘 근처까지 전진하다가 화해 협정에 의해 그리스도교도의 평화스러운 예루살렘 순례를 보증받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⑤제 4차 십자군 운동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의 원정이었다. 그런데 이 원정은 교황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유도되어 동로마제국을 멸하고 여기에 라틴제국(1204-1761)을 세웠다. 이들 원정군의 난폭한 행동과 약탈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조장시켜 재결합을 불능케 하였다. 이는 서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교황의 체면을 잃게 하고 십자군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 터키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⑥재 5차 십자군 운동 제5차 원정(1219-l22l)도 상혼에 의해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으나 전리품의 분배 분쟁과 지도자의 무능으로 이슬람교도에게 회수되고 말았다. ⑦제 6차 십자군 운동 제6차 원정(1225-1229)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일으켰는데 전투없이 이슬람교도의 내분을 이용하여 외쿄수단에 의해 10년간 휴전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쪽 일대를 그리스도교인의 수중에 넣어 스스로 예루살렘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왕국도 15년 만에 명망하고 말았다. ⑧제 7차 십자군 운동 이어 제7차 원정(1248-1254)은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주도하에 적의 본거지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병력약화로 패하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가 후에 인질대금을 지불하고 석방되는 창피를 당하기도 하였다. ⑨제 8차 십자군 운동 제8차 원정(1270-1272)은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주도하에 또 다시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를 공격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유행병의 만연으로 실패하고 또 왕도 병사함으로써 끝났다. 그밖에 1212년에 소년소녀십자군(불,독에서 수천명) 원정이 있었는데 이는 사기꾼들에 의해 잔인하게 악용되었고 중도에서 해산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악덕한 선박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3.십자군 원정의 결과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십자군의 영향은 자못 크다. 십자군 운동은 전성기의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됨에 따라 중세 유립사회의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으로 그 절정에 달했으나. 성지회복이 실패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신앙열도 식어지고 교황의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십자군의 실패는 원정의 주중 역할을 하고, 가장 많은 희생을 바쳤던 기사계층의 몰락을 촉진하며 봉건제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아 수임이 줄고 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서유럽인들은 이슬람문화와 비잔틴문화와의 접촉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에게서 큰 영향과 자극을 받았고, 이로써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에 수반한 화폐경제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이었던 장원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그 전까지 교황의 권위에 눌려있던 국왕과 상인들은 눈에 띄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업의 발전및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또한 유럽 사회가 봉건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 데에도 한몫을 하였다. 즉,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었던 것이다. Ⅲ 결론 - 십자군 전쟁의 의의 성지회복이라는 미명하에 각각의 계층과 각각의 나라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비록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잘못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면의 대변질을 초래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로마교황청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호소는 국경을 넘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단결시켰고 제1차 십자군운동의 성공은 당시에 성직서임권 문제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간에 각축을 벌이고 있던 상황 속에서 교황의 권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군운동은 평신도들이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구현한 운동이었다. 다른 한편 원정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추락과 원정에 참여한 봉건제후들의 몰락으로 서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일찍이 군주국가를 출현케 함으로써 후일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열시킨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의 공동체 의식을 크게 강화하였고 유럽의 시야를 확대하였으며, 비잔틴과 동방 특히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오늘의 서양문화의 통일체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백여년간이나 그리스도교 세계를 위협하던 이슬람세력의 유럽진출을 저지하였고 교세확장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황청은 분열된 동방교회와의 접촉을 통해 재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제4차 원정에서 교황의 뜻과는 달리 이기적인 상인들에게 이용되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라틴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동서교회의 재결합이 희망을 잃게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십자군운동은 본래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지회복을 통한 순례의 보장이란 공동사업이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잘 훈련되지 않았고, 비조직적이고 또한 오랜 원정이었고, 멀고 험난한 고행길은 신앙심을 가지고서도 극복하기 어려웠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십자군운동의 성격과 의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동서간의 사회상과 십자군운동을 통한 유립의 대변화를 외면할 수가 없다. 즉, 정치적으로는 군주권의 강화로 중앙집권의 길을 열어 절대군주권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동서문물의 교류로 풍요로움을 가져왔으며, 도시발달과 더불어 활발한 상업활동은 자유정신을 고취하기에 이르렀고 로마멸망 후 3대 문화권의 접측과 통합은 오늘의 서양문화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 - 남궁원 · 강석규 엮음 출판사: 일빛 . 『세계사 신문』 (문명의 여명에서 십자군 전쟁까지)- 세계사신문편찬위원회 지음 출판사: 사계절 . 『세계 문명의 역사Ⅱ (중세에서 종교개혁까지)』E.M.번즈, R.러너,S.미첨 지음 박상익 옳김 출판사: 소나무 『세계의 역사와 문화』 이석우, 신용철 지음, 출판사: 탐구당 『세계사 편력』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J.네루 지음 곽복희 , 남궁원 옳김 출판사: 일 빛 『위험한 세계사2』미사오 키류 지음 / 김승일, 신금순 옳김 출판사: 넥서스 『약탈의 역사』 (유럽의 헤게모니 확립) J.H.패리 지음 / 김주식· 김성준 옳김 출판사: 신서원『알기쉽게 이야기로 꾸민 세계사 상』 (고대 시대부터 중세 시대 말까지) -세계역사연구회 지음 / 감수: 권중달 출판사: 오상 출판사 『서양사개론』 민석홍 저 출판사: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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