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복음주의적 정치참여의 방향성에 대한 고찰
I. 조선의 멸망을 미리 축하함
19세기 말엽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침투를 적극 선동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있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 개화사상과 정치적 혁신을 고취하였고 조선 정부에 자신이 경영하는 학교 경응의숙(慶應義塾)의 문하생들을 진출시키기도 하였다. 1884년 후쿠자와의 지도가 주효하여, 조선의 개혁을 주도하던 개화파는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갑신정변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 개화당 정부의 혁신 정강은 문벌의 폐지와 국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부패의 청산, 토지제도의 개혁과 세제의 개혁, 재정의 개혁과 형법의 정비, 군제와 경찰제도의 쇄신 그리고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심의 등 정의롭고 효과적인 정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을 지원하며 고종을 옹립하는 일본군 200명은 청병 1500명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 4일로부터 3일째 되는 6일 오후, 조선의 왕 고종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과 비원 일대에서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벌어진 격전에서 패퇴한 일본군을 따라 개화당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의 삼일 천하가 실패로 끝이 난 8개월 후, 일본의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조선에 대한 1885년 8월 13일자 사설 때문에 발행정지 명령을 받았다. 이 사설은 개화당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당시 한국에 관한 수백 편의 논설을 쓴 바 있는 후쿠자와 유기치가 쓴 글이었다. 사설의 제목은 "조선 인민을 위해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제목이었고, 그는 정부를 만드는 이유가 주권을 가진 국민의 명예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인데 조선 정부는 이들 중 아무 것도 효과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망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지금 조선의 상황을 보니 왕실은 무법하고 귀족은 발호하며, 세법마저 문란의 극에 빠져 인민에게는 사유의 권리가 없다. 또 단지 정부의 법률이 불완전하여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귀족과 사족(士族)의 무리가 사욕과 사원(私怨)을 가지고 사적으로 구류하거나 다치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이 있어도 인민은 이를 호소할 방법이 없다. . . . 적어도 사족 이상, 직접 정부와 관련이 있는 자는 무한한 권위를 자행하고, 하층민은 상류계급의 노예에 불과하다. 인민이 이미 이렇듯 국내에서 경멸을 당하는 터이므로, 그 밖에 독립국민으로서의 영예를 운위하는 것은 거론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정부는 왕실을 위해, 또는 인민을 위해 외국과의 교제를 담당하면서도 세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명의 풍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외환을 당하고 어떠한 굴욕을 당해도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며, 전혀 우고(憂苦, 근심하여 고통함)하는 기색이 없다. 오로지 바쁜 것은 조신(朝臣)의 권력영화를 정부에서 다투는데 있을 뿐이다. . . . 따라서 나는 조선의 멸망, 그 시기가 머지 않음을 헤아려서 일단은 정부를 위해 이를 조문하고, 돌이켜보아 그 국민을 위해서는 이를 축하하려는 사람이다.
이웃나라의 멸망을 바라보며 조선을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탐욕스런 지식인의 주장을 모두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한 나라의 기능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주권국가로서 국민의 명예를 지키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은 국가로서의 효율성을 상실하였고, 열강의 침탈을 효과적으로 격퇴하는데 실패함으로 국가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등 조선 주변의 열강을 굴복시키고 어떤 나라보다 조선을 면밀히 장악하였던 일본은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II. 국가의 본질에 대한 현상적 고찰
우리는 지난 세기 국가가 독립되면서 양분된 채로 50년을 보냈으며, 남북의 분단된 체제가 많은 구조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목도하여 왔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치질서 속에서 우리 나라를 정상적인 국체로 발전시켜야하는 과제는 민족사의 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초기에 국가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던 한국 교회는 통일 조국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선진 정치개혁을 위하여 어떠한 참여의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 연구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정치참여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는 21세기의 시민사회를 맞이한 한국 복음주의 교회와 그 구성원은 어떠한 정치적 대안을 예비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구원받은 신자들이 모여서 이룬 신앙공동체인 교회와 대조를 이루며 병치되는 다른 한 영역은 역사적 발전과정을 따라 온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이다. 윤리적으로 심각한 타락의 현상을 보이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국가 속에서 자신의 신앙적 윤리와의 긴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산상수훈의 절대적 명령을 강요할 수 없는 정치기구의 속성과 대치할 때 더욱 그러하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은 정치기구를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말은 부분적으로 옳다. 위대한 광채로 빛났던 정치적 지배자들과 군주들의 역사는 지금도 정치의 영역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강제력과 폭력의 질서이며,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나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두 나라의 긴장은 "사랑의 윤리"와 "힘의 윤리"의 긴장이며 절대적인 선을 목표로 삼는 윤리와 체제의 수호를 위한 세속적인 결정 속에서 도덕적 차선책을 구하는 상대적 윤리의 갈등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가 교회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선교현장에 선교사--정치인이나 여론형성자--로 파송되었을 때 처음 부딪히는 문제는 이 같은 윤리적 긴장의 문제이다. 징계하는 칼을 가진 관헌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에게 무저항의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성도가 공직자로서 정책결정자가 될 때 부딪히는 문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은 악으로 갚으며(render evil for evil) 강제력을 통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선교현장의 기독교 정치인이 산상수훈의 윤리를 거스르면서도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영역의 윤리적 긴장 속에서 기독교인은 윤리적 갈등을 체험한다. 이는 신자가 국가 속에서 아가페의 절대적 요청을 상대화시키고, 종교적 신념을 희석시켜야 하는 고통이다. 특히 정치적 행동이 간헐적인 것으로부터 직업적인 것이 될 때, 관리로서의 기독교인은 국가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상대적 선을 택하므로 갈등을 겪게 된다.
이처럼 윤리적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의 본질이 권력의 강제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국가로 대표되는 정치영역의 본질적 특성은 권력의 세계이며, 권력은 물리학에 있어서의 에너지처럼 정치의 기본 개념이다. 그러나 권력현상이 사회의 정점에서 정책결정을 하는 국가의 독점물인 것만은 아니다. 정치를 "사회통합을 위한 권력관계 혹은 권위관계"로 볼 때, 권력현상은 일반사회의 각 공동체와 제도에서도 보편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 규모와 강도에 있어서 국가권력(state power)은 사회권력(social power)이나 사회적 권위(authority)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으로 표현되는 권력의 속성은 "물리적 강제력을 동반하는 최종적 권위이며, 체포, 구금, 사형의 재가를 도구화시킨 합법화된 폭력"인데, 이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거나 정치영역에서 직업정치인으로서 봉사하려는 "정치선교현장"의 기본 환경을 이룬다.
모든 국가는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트로츠키의 말은 기억할 만하다. 비록 강제력이 국가의 유일한 수단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강제력은 국가의 근본적인 수단이다. 그 이유는 강제력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국가는 존립할 수 없으며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막스 웨버(Max Weber)가 "일정한 영토 내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독점한 공동체"를 국가라고 규정한 것은 국가의 본질에 관한 정확한 통찰이다.
강제력에 의해 대표되어지는 국가의 본질적인 속성은 폭력을 향해 무제한으로 열려진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마키아벨리가 천명했듯이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이 필요하다는 말은 군주의 강제력 이외에도 대중조작의 능력과 지혜의 필요를 의미한다. 거의 많은 정권의 시작이 지주, 군벌, 노예소유자, 불법적 정복자의 폭력으로 시작하지만, 곧 이어 도입하는 합리적 수단--입법기관, 사법기관과 행정관서--은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체제의 안정을 위해 사용된다. 폭력적 실체인 국가의 알리바이를 위한 합헌성(constitutionality)과 행정을 맡은 관리체의 구성은 국가의 강제력을 순화시키므로 권력을 장기화시키려는 의도로 차용되는 강제력의 외피이다. 이처럼 무력과 합법성, 강제력과 합리성은 정치선교의 영역을 관통하는 논리이다.
국가는 합리성을 차용하나 강제력을 그 기본적 속성으로 한다. 강제력을 방법론적으로 수용하며 계산된 유죄성의 윤리--책임윤리 (the ethics of responsibility)--를 따르는 국가질서는 종말 이후에도 지속될 종국적인 질서가 아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국가를 종말적 제도로 보거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함께 해체되는 질서이며 죄에 의해서 더하여진 질서인 것이다. 죄악이 없는 세계에서는 법률의 제재나 경찰이나 군대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누가 부러지지 않은 곳을 싸매며, 건강한 자에게 지팡이를 주겠는가? 따라서 쿨만은 국가를 다만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긴장 속에 존재하는 잠정적(provisional)인 질서로 보았고,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당시의 로마국가를 무비판적으로 절대화하거나 최종적인 제도로 재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III. 공중정의를 수행하는 국가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 있는 국가를 무효화하지 않으며 그 존립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국가에 대해서도 복음이다. 바울에 의하면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있다. 종교적 순수성의 유지와 진리수호라는 명제를 위해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공중정의(public justice) 혹은 공의를 위해 강압적 교육과 질서유지기능을 수행하는 국가의 역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의 정치무용론(政治無用論)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떤 굴레도 없는 세계를 원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윤리적 허약성과 죄에 대한 친밀성을 망각한데서 생기는 근시안적 견해이다. 정치질서는 타락을 향해 열려진 인간의 열정을 부분적으로 억제하는 정의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정의를 이루어야할 국가가 보여주는 가장 큰 해악 중의 하나는 전제(tyranny)이다. 이는 강력한 정권이나 지도자가 각기 다른 사회영역의 분배의 구획을 짓는 담장을 파괴하는 것이며, 사회의 다원주의적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의 형태는 다원적 영역의 조합만큼이나 다양하다. 아울러 전제는 분배의 영역 중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정치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관직의 분배와 금전의 사용으로, 또한 일과 휴식의 영역에서 인간의 분배 기준을 파괴한다. 권력과 돈의 전제라는 현상은 오늘날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되는 이는 명백한 영역파괴의 현상이다. 이 때문에 소유의 권력과 국가 공무원의 권력이 적절히 견제되지 않는 한, 그들은 항상 한 나라 속에서 전제군주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한 국가의 정치권력이 가진 힘이 막강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국가의 정치권력은 이중성을 가진다. 국가의 정권은 상이한 모든 가치의 추구를 규제하므로 분배정의의 중요한 매개수단이 된다. 그것은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분배되고 채택되는 영역들의 경계를 보호한다. 정치지도자들은 세습적인 지위를 제한하고, 또 한편 영웅으로부터 범죄자를 구별해 낸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경계의 벽을 보호하며, 부모의 강압적 권위를 규제한다. 그들은 군대의 징병방식을 결정하며 공무원 임용고시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아울러 그들은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자신의 권력을 헌법으로 제한하고 스스로 복종한다.
그러나 권력은 그 강력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항상 전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권력이 유지되는 한편 동시에 억제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이 전제의 왜곡된 형태를 가지는 경우는 다음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국가의 권력과 재산, 재능, 혈통의 구분이 무너짐으로 국가 권력이 다른 가치에 의해 식민화 되는 경우이다. 식민화된 권력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가치에 의해 폭군화된 전제적인 권력이 되어버린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는 상실되고 국가는 자율적 분배의 영역을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회적 가치를 유린하도록 도구화된다. 국가가 자본가의 도구이자 경제의 부수현상이라는 비판은 권력의 영역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경제에 의해 식민화 되어버린 상태에 대한 언급이다.
둘째의 경우는 정치권력의 영역이 강력한 영역으로 등장함으로 다른 영역의 사회적 가치들을 정치화시키는 전체주의의 경우이다. 현대의 전체주의는 전제의 최고형태이다. 이는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 생기는 체제로서 다원주의적 평등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체제이다. 전체주의는 관료체제와 법정, 시장과 공장, 정당과 노동조합, 학교와 교회, 친구와 연인, 친척과 이웃시민들을 막론하고 국가의 도구로 만듦으로 새롭고도 근본적인 불평등을 일반화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규제를 담당하는 권력은 유지시킴과 아울러 왜곡된 권력이 다른 가치로 교환되는 가능성을 제한하고 봉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탁월한 정치사상가의 한 사람인 마이클 월쩌는 정치권력이 다음과 같은 한계 안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국가와 다른 영역, 즉 가정, 사법체제, 종교, 교육의 영역의 경계와 그 의미를 확정짓는 것이며, 정실주의의 극복과 각 영역의 합종연횡을 방지함으로 다양한 영역의 다원적 평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마이클 월쩌는 국가의 권력이 머물러 있어야 할 한계를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킨다.
① 국가의 주권은 노예화를 이루는 데까지 확장되지 않는다. 국가 관리들은 그들의 동료 시민이기도 한 그들의 국민들의 인격을 탈취할 수 없으며, 국민의 봉사를 강요할 수 없다. . . . ② 친권과 결혼에 관한 봉건적 권리들은 국가의 법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 밖에 자리하고 있다. . . . ③ 국가 관리들은 유죄와 무죄에 관해 공유하고 있는 이해를 위반할 수 없으며, 사법체계를 붕괴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 전용할 수도 없다. ④ 국가 관리들은 정치권력을 매매하거나 특정한 결정을 경매에 내 맡길 수 없다. 또한 그들의 권력을 그들 가족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으며, 정부의 관직을 친척이나 동료 친구들에게 분배해 줄 수 없다. ⑤ 모든 국민/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따라서 국가 관리들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차별대우하는 방식으로 행위 할 수 없다. . . . ⑥ 사유재산은 자의적인 세금부과나 몰수로부터 피해를 입을 가정이 없어야 한다. . . . ⑦ 국가 관리들은 그들 국민들의 종교적 삶을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어떤 방식으로도 신의 은총의 분배를 규제하고자 시도할 수 없다. ⑧ 비록 국가 관리들이 교과과정을 법제화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교과 과정의 실질적인 교육과정에 관여할 수 없다. ⑨ 국가 관리들은 사회적 가치의 의미와 적합한 분배 범위에 대해,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을 규제하거나 검열할 수 없다.
국가에 관한 자유주의적 접근과 전체주의적 접근에 대하여 비판하는 다원주의적 국가론에 있어서 국가의 절대주권에 대한 거부는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다. 다원주의의 한 고전적 이론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있어서, 인간 세상에는 다양한 분화된 영역이 존재하고 그 각각은 나름대로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보이는 물질계의 앞마당과 보이지 않는 영계의 뒷마당을 가지는 데, 이는 단순하지도 획일적이지도 않으며, 무한히 복잡한 유기적 총체로서 구성되어진다. 개인은 오직 다양한 집단 안에서 형성되어지며 이 다양한 집단은 인간의 총체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총체를 이루는 각각의 톱니바퀴들은 자신의 축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은 자신의 정신, 혹은 지도적 지침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각 영역들은 넘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담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도덕적 세계, 과학의 세계, 비즈니스의 세계, 예술의 세계라고 말하는데, 이는 영역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도덕의 영역, 과학의 영역, 비즈니즈의 영역, 예술의 영역, 교회의 영역, 가정의 영역이라고 명명된다. 이러한 영역은 자신의 범주와 자신의 주권을 가지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한다. 아울러 이러한 영역은 각기 다른 법칙에 의하여 존재하며 자신의 규칙과 각 영역의 전문가나 수장에게 복종한다. 사상의 영역에는 논리의 법칙이 주도하며, 양심의 영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장을 한다. 아울러 믿음의 영역에서는 그의 삶의 변화를 통하여 믿음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자가 강력한 주도권을 가진다.
IV. 21세기 시민사회와 다원적 국가의 형성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지금 세계 속에는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확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억압적 국가의 시대가 물러가고, 이제 체제에서 해방된 시민들의 활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 참여증대와 권위주의의 퇴조는 20세기의 마지막 한 세대를 장식한 세계적 현상이다.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남미의 군사독재체제의 붕괴, 80년대 말부터 동유럽의 폴란드, 체코와 루마니아의 공산정권 붕괴, 아시아에서도 필리핀의 권위주의체제의 붕괴와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으로도 이러한 경향은 극명하게 확인된 바 있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의 구 소련의 해체 또한 시민사회의 확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경향은 유명한 미국의 미래학자 죤 네이스비트(John Naisbitt)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는 메가트렌드(Megatrends)라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미래의 사회가 중앙집권화에서 지방분권화로, 제도와 기구에 대한 의존에서 개인과 시민의 자조독립(自助獨立)적 활동의 증가로, 대의제 민주정치에서 참여민주주의로 변화될 것을 예고한 바 있다.
새롭게 변화된 시민사회에서 나타나는 역학 구도는 국가라는 정치적 영역, 시장이라는 경제적 영역, 그리고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재편되는 경향이 확연하다. 권위주의적 국가의 쇠퇴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의 확보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국가와 시장, 혹은 국가와 자본가의 결합이 해체되는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과거 개발독재국가에서 경제발전을 주도하던 권위주의 정부는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대성장국가였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는 기업이라는 경제영역에 대하여 자율성을 부여하고, 시장 개입과 통제 대신 시장의 관리자로 내려앉는 합리적 국가로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산업화에 의하여 강력한 부문으로 성장한 시장이 윤리적인 중립상태에 있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시장주의자들은 이익추구라는 기업의 사적인 욕구가 시장의 힘을 통해 공적인 덕으로 승화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시장의 메카니즘이 자기-규제적이고 자기-수정적이며 자기-충족적이므로 그 자체로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어떠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장의 결함을 보여주는 실례로 가득 차있다. 시장의 과도한 자율성과 주도적 역할은 반드시 부와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를 야기시킨다. 더 나아가 경제적 자원의 불평등한 확보는 자본가들에게 조직적 정치활동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제공한다. 이것이 돈과 재화가 교환되는 시장의 어두운 모습을 가진다.
종종 시장에는 기업가의 강력한 대성공이 발생하며, 이 성공자들은 시장으로부터 부와 함께 위신과 영향력을 독점하면서 시장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 때 시장은 소비자를 주체로 모시던 시장이 아니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이제 순전한 시장의 신화로 남으며, 실제의 시장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생산품과 판매 독과점"은 소비자를 철저한 객체로 전락시킨다. 소비자는 자기에게 제공된 것 대신에 필요한 다른 상품을 만들 힘을 가지지 못한다. 회사는 우리들이 선택하는 상품의 범위를 정하며 중요한 의사 결정은 기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만일 이러한 기업의 패권주의에 시장이 넘어가 버린다면, 기업가에 의해서 주도되는 급진적인 자유방임경제는 다른 모든 영역을 침범하여 분배과정을 장악하는 전체주의 국가와 같아질 것이다. 이는 모든 사회적 가치가 상품으로 변형되는 "시장 제국주의" 현상을 낳는데, 이는 경제적 가치가 시장의 영역 외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돈의 지배, 부유한 자들을 위한 면죄부의 판매, 관직의 매매, 법정의 타락, 그리고 정치권력의 이기적 행사와 같은 악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시장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전제이다.
돈의 정치적 영향력이 관리를 굴복시키고 정치지망생과 공무원을 부리며, 노동자를 무력화시킬 때, 우리는 사회적 가치의 울타리를 다시 조정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는 경제적 가치의 재분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즉, "절망적인 교환을 금지"시키거나 "노동조합을 육성"하는 것, 강력한 세금제도와 재산권 소유권의 상속에 대한 제한을 통해 우리는 정치와 경제간의 구분선을 다시 그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로소 "시장은 정치의 영역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과 나란히 서있게 된다. 돈의 권력이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때, 건전한 사회는 다음의 제 가치들은 매매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만 한다.
① 인간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② 정치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③ 형사적 정의가 매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④ 언론, 집회, 결사, 종교의 자유를 위해 돈을 지불할 필요는 전혀 없다. 또한 이중 어느 것도 경매될 수 없다. ⑤ 결혼과 생식의 권리는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⑥ 정치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권리는 매매될 수 없다. ⑦ 병역 면제, 배심원 의무의 면제 또는 공동체로부터 부과된 여하한 형태의 과업에 대한 면제를 정부가 팔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민 또한 이런 면제들을 살 수도 없다. ⑧ 정치적 관직은 매매될 수 없다. ⑨ 경찰에 의한 보호나 초등, 중등 교육 같은 기본적 복지 서비스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구매될 수 있어야 한다. ⑩ "최후 수단을 통한 흥정," 즉 절망적 교환은 . . . 금지된다. 하루 8시간 노동, 최저 임금, 보건과 안전에 관한 규정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⑪ 포상과 명예는 사적이건 공적이건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⑫ 종교적 은총도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⑬ 사랑과 우정은 매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⑭ 범죄 행위도 돈으로 살 수 없다.
고도로 분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회영역의 고유한 주권에 대한 주장, 즉 영역주권의 확보는 세속적인 권위주의나 탐욕스런 시장지배에 대한 방어책을 제시하여 준다. 영역주권은 모든 지상적 권세의 한계를 설정하며 권위의 적절한 분배를 지지한다. 이러한 분화된 영역이 존재한다는 신념의 기저가 상실되거나 통합적인 비젼이 결여될 때, 사회는 파편화되거나 전제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이 살아있을 때, 분화된 영역은 더욱 성숙함에 이르러 각양의 섬김이 가능하게 된다. 다양한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많은 영역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주권은 사회의 분열을 획책하지 않는다. 한 영역의 주권확보는 각각의 영역들은 타 영역들을 존중하며 상호작용을 해야하며 모든 종류의 협조 속에서 즉 영역의 보편성의 인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각종 영역의 톱니바퀴는 서로 맞물려 있으며, 인간의 삶의 다양한 측면의 풍요한 다차원성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원리적으로 재확인 하여야 한다. 따라서 한 톱니바퀴가 회전축을 벗어나서 돌아간다면 다른 것에 영향을 주어서 전체의 운동을 불규칙하게 만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다양하게 성숙된 시민사회의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 이유는 발전되어진 다양성 있는 시민사회는 정치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적절하게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신삼권분립(新三權分立)--국가의 정치적 영역과 기업의 경제적 영역, 그리고 비정치, 비경제 영역인 시민사회의 영역--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V. 공의로운 한국 사회를 위한 복음주의적 대안
시민사회의 발전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그 맥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분화와 해방"(differentiation and liberation)이라는 인류 문명의 발전법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조직과 제도가 분화되고 이에 상응하는 의식의 변화가 역사의 철칙이라는 확신에 근거한다. 이는 이미 화란의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에 의하여 문명과 제도의 "분화"라는 말로 설명된 바 있다. 실제로 분화와 해방의 장구한 역사는 먼저 정치적 압제로부터 종교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종교와 정치는 오랜 동안의 융해 상태를 거쳐왔다. 고대국가에 있어서 제사장과 같은 종교의 직분은 분화되었으나 아직도 종교는 정치를 제한하고 견제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유대국가는 역사 속에 최초의 제한군주제를 형성하고 선지자와 율법을 통하여 국가의 정치질서를 견제하고 비판하게 되었다. 이후 중세의 종교적 영향력으로부터 학문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으며, 과학은 아직도 종교적 지식을 탈각하지 못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종교의 후원아래 있었다. 그러나 중세 이후 대학의 발전과 계몽주의적 이성의 강조는 과학의 문제를 신학으로부터 분리시켰고, 학문은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국가와 정치부문의 우위로부터 근대의 경제적 영역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시민은 경제적 실력을 통하여 국가에서 정치적 지분을 얻었으며 시장은 이제 국가의 영역에 내재한 것이 아닌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영역이 거대화되어지면서 기업의 영역은 이제 국가에 필적하는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는 다양하게 분화되어진 국가, 기업, 종교, 학교, 가정 및 문화 예술 영역으로 다원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한다는 것은 각 영역간의 공정한 사회적 가치의 분배가 존재하며 다양한 시민단체의 생성과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어떤 영역에서 지배적인 사람들이 다른 영역의 "가치의 분화"를 저지하지 않는 그리고 다른 가치에 대한 "독점"이 배제된 상태이다. 하나의 사회적 가치가 다른 가치와 구별된 형태를 지니며 특정 방식으로 분배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사회의 각 영역은 조화롭게 발전되어질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사회는 분화와 함께 해방의 역사를 가진다. 따라서 공의로운 사회를 위한 복음주의적 시민운동이란 사회의 분화에 의해서 확보된 피조물을 해방시키는 사역이다. 우리는 시민운동의 방향성을 파악하기 위해 서구의 해방의 역사적 방향을 살필 수 있다.
해방의 역사적 시나리오는 첫째,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을 통해 왕권에 대하여 귀족의 권리와 위상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위적 정권의 제한은 피조물의 해방의 첫 단계였다. 둘째, 해방의 위대한 사건은 1776 식민지 독립선언을 통한 미국 민중의 권리 찾기로 나타났다. 민중의 해방은 식민지의 독립을 통해 미국의 발전을 길을 열었다. 셋째, 또 다른 위대한 해방의 사건은 흑인 노예들이 1863년의 노예해방을 통해 소외와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진 것이다. 넷째, 미국은 1920에 들어 제 19차 헌법개정을 통해 여성의 권리, 즉 참정권의 회복에 이르게 되었다. 다섯째, 1934년 미국은 이제까지의 원주민 박해의 정책을 포기하고 인디언 보호법을 통하여 소수계의 인종보호를 의무로 삼았다. 여섯째, 미국은 1960년대에 이르러 흑인 참여법을 통과시키고 소수계로 하여금 자유로이 투표하고 피선거권을 가지므로 참정권을 보장하기에 이르게 하였다. 일곱 번째로, 1973에는 멸종단계의 생물 보호법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여덟째, 동년에 미국은 GNP의 3%를 장애자를 위해 투자하여, 400억불로 64개의 장애인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이러한 해방의 방향성은 시민운동의 주제와 방향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분화와 해방을 통한 다원주의적 분배체제의 유지는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을 확립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는 다원주의적 국가에서 다원적 평등을 용이하게 만드는 제도적 편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이 같은 다원적 평등 안에서 안온함을 향유하기만 하고 그것을 방어할 태세가 전혀 되어있지 아니한 시민이라면 이러한 체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는 시민의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시민의 능력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는 둘째 조건은 시민들이 하나의 지배적 가치에 순응하지 않고 "여러 가치의 범위를 아우르며" 자신이 속한 "고유한 영역의 의미를 방어"하면서 다른 여러 가치에 의해 함몰되지 않는 견고한 "거리 두기"에 성공하는 한, 정의로운 분배 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정의로운 분배 영역의 유지를 확보하여주는 시민의 역량을 우리는 "비판의식"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비판의식은 사회비평을 낳는데, 이는 정의의 영역들이 무너지는 병리현상을 가리우거나 이 현상을 위장하는 베일을 벗기기 위한 작업을 효과 있게 해준다. 중세시대의 비극은 사회평론, 사회비판의 부재에 있었다. 그들은 위계적 체제에 압도된 나머지 비판 의식을 상실하였고 새로운 사회의 발전적 이상은 부각되지 못하였다. 중세의 "위계"는 단지 신민의 "봉사"를 요청하였고, 오직 봉사는 중세 봉건시대의 사회적 이상이었다. 이는 교권과 그 시대의 정신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평등의 성숙은 그러므로 봉건사회를 이루는 위계질서에 대한 "내부적 비판"(internal critique)이 없이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회비평가는 자신이 처한 가치의 분배체제가 가지는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보통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시작하며 혹은 이미 공감된 사항을 드러내므로 확실한 적용점을 가진다.
마이클 월쩌에 의하면 개혁자 마틴 루터는 영웅적인 사회비평가였다. 그는 교회의 비평가로서 당시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교회 내부의 부조리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엷은 보편주의"(thin universalism)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두터운 특수주의"(thick particularism)에 머물렀다. 다원적 평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의 방식은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각기 다른 영역에 대하여 공유할만한 부분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회적 분화의 총체적 영역을 소수의 전문가의 언어가 아닌 공통의 언어로, 소수의 특별한 의무가 아닌 다수의 공통의 관심사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비평가는 가장 효과적이기 위하여 가장 지역적이며 특수주의적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분배정의야 말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구체적인 것이며, 분배를 논하는 정의야말로 그 의미가 사회, 시간,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최대주의적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평론의 목표는 사회가 다원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세한 사회적 가치가 낳은 영역의 침범으로부터 다원적인 "영역을 방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비평은 금전지배, 신정정치, 엘리뜨 지배, 노인지배, 기술지배 등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사회는 어떤 하나의 가치에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거부한다. 그러나 사회를 일원론적 단일구조로 보는 전체주의적 극단과 함께 사회를 거대한 교환체제라고 보는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즉 자율적인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보려는 논리는 배제되어야 한다. 사회는 자유로운 시장의 논리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울러 사회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여러 가족적, 지방적, 정치적 및 종교적 공동체의 관여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VI. 시민운동의 다양한 방법.
이러한 정의사회의 이념을 위한 방법은 다양하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매년 초 시민단체 공동정책협의회에 참여하여 연합활동을 위한 정책기조를 확인하고 동역을 다짐하는 60여 개의 공식적인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다양한 강조점을 가지면서 사안별로 연대사역을 한다. 이들 여러 단체의 사역 영역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보호하며 분화와 해방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운동의 목표는 각각 교육, 교통, 농업, 문화 생활. 보건의료, 사회복지, 생활협동. 소비자, 실업극복, 언론, 장애우, 정보화, 정치, 청소년, 통일, 행정, 환경 등이 있는데, 특별히 다음의 몇몇 단체들은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시민단체이다.
첫째로 경제의 영역에서는 경실련과 경제정의 실천 불교시민연합, 그리고 참여연대를 들 수 있다. 둘째로 국민생활 부문에서는 교통문화 운동본부, 녹색소비자연대, 녹색연합,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등이 있다. 셋째, 교육부문에서는 교육개혁, 교육자치를 위한 시민연대, 대한 YWCA연합회, 서울 YWCA, 한국YMCA 전국연맹, 흥사단 등이 있다. 넷째, 윤리적인 구체사안의 실천을 위한 모임으로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통장애인 협회, 청소년을 위한 내일 여성센터, 그린 훼밀리 운동연합 등이 있다. 다섯째, 환경부문의 시민단체로는 기독교 환경운동연대, 환경운동연합, 환경마크 등이 있으며, 여섯째, 소외층을 위한 운동단체로는 다일공동체,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있다.
위와 같은 과제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시민운동은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그 중의 첫 번째의 방법은 개인을 통한 방법이다. 예컨대, 24세의 여성 줄리아 힐은 북가주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삼나무 숲의 가치를 확신한 환경운동가이다. 그녀는 50-60미터의 거대한 삼나무로 이루어진 숲, 나이가 1,000년 2,000년을 먹은 생태학적으로 기적적인 나무들, 그리고 그 숲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의 가치를 보고, 그것의 벌채를 막기 위해 60미터의 나무에 올라가 천막을 쳤다. "오래된 나무들을 존중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그녀는 아래로 내려오지를 않았다. 1997년 12월 10일부터 1999년 3월 2일까지 1년 2개월 이상을 그녀는 환경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나무 위의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므로 결국 정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이 삼나무 숲을 목재회사로부터 매입하여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둘째는 집단을 통한 방법이 가장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하천을 오염으로부터 지켜나가는 것은 개인으로서 성취하기는 매우 방대한 작업이다. 1995년 경기도 안성시에서는 십 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안성천 생태탐사를 하였다. 신음하는 강을 확인하면서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과 주민이 연합하여 「안성천 살리기 시민모임」을 만들고 환경 청지기 사역을 시작하였다. 본류에 이어 수 십개의 실개천도 생태탐사를 하였다. 계속된 항의와 고발은 안성천을 복원시키고 폐수에 밀려 쫓겨간 붕어, 잉어, 모래무치가 돌아오게 만들었다. 시에서는 하수종말처리장과 친수공간을 건설하는 투자를 시작하였다. 마음이 거듭난 성도들의 단체활동에 의해 시민과 시공무원이 거듭나고 환경이 거듭나게 된 것이다.
셋째로 시민단체의 연대 행동을 통해서 효과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예컨대, 지난 수년 동안에는 몇 개의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의정사상 처음으로 시민이 국회상임위를 직접 감시하고 평가하는 "의정감시단"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제 정부도 시민단체의 직접적인 감시활동으로 질 높은 정치의 강력한 요구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치적 영역과 함께 재벌 또한 연합된 시민운동을 통해서 전달되는 욕구를 무시할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1999년 초에는 온 몸을 구리빛으로 채색한 한 벌거벗은 남성이 자신의 성기와 휴대폰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는 유수한 기업의 핸드폰(PCS) 광고가 일간신문에 나온바 있다. 이는 즉시 "음대협"(음란폭력성을 조장하는 매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시민협의회)란 시민단체에 의해서 항의를 받고 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받아들였다. 공문발송과 항의전화, 불매운동, 가두집회와 켐페인, 그리고 서명운동을 하겠다는 선언은 이러한 운동의 효과를 증대시켰다.
VII. 시민운동은 복음주의적 선교운동이다.
복음주의적 기독시민에게 있어서 시민운동은 시대의 요청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당위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21세기의 시민사회를 맞는 우리는 전례가 없는 사역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자유로우며 어떠한 영역도 시민사회의 한 부분인 교회에 대한 우월한 권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민사회에서 성도들의 사역은 거의 무제한으로 열려있다. 둘째로 21세기의 시민사회 속에 있는 교회와 기독시민은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이나 모든 영역에서 그 선지자적 메시지의 총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고 있다. 모든 삶의 영역은 만개되고 있으며 인간성의 발현은 그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시민사회 속의 교회는 이제 개인의 구원과 내적 경건에 과도하게 집중하였던 몇 세기를 보내면서 개인의 구원과 함께 교회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개인의 내적 경건과 함께 사회의 변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이 개인과 집단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자연의 모든 관계에서 단절될 수 없음을 심각히 고려하게 되었다.
시민운동의 확산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구미의 선진사회나 권위주의를 극복한 제 3세계에서 시민의 참여증대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시민이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양한 시민의 욕구에 둔감한 공공기관이나 정부의 시책이 시민사회의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우리 나라 시민운동의 시작도 이와 동일한 맥락 위에 서있다. 유권자인 시민을 의식하지 않는 끝없는 정쟁(政爭), 정부와 공공기관이 시민에 대해 취하는 고압적 자세, 그리고 주민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결정되는 정책의 방향은 이미 국가에 대한 시민의 자의식을 고취시켰다.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기는 환멸은 경제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정경유착의 상징인 천문학적인 액수의 정치자금과 중소기업이나 영세업종에 대한 대기업의 무자비한 횡포는 경제의 영역에서 소시민에게 주는 또 다른 종류의 실망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민운동은 정치적인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그 운동의 의미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유형교회는 시민사회의 한 부분으로 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국가나 시장의 일부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한 중요한 영역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이루려는 교회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세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비젼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시민운동은 통전적인 선교의 일환이다. 이는 정의와 사랑의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며 영혼의 구원과 함께 공동체적인 삶에서 샬롬을 추구하려는 성도들의 노력이다.
매년 모이는 한국시민단체 협의회에서 많은 단체가 목사, 장로를 비롯한 압도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선교적 실천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다원화된 시민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통한 시민운동의 확산은 또한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고 있다.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요청 받고 있기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이 사회에서 가정 파괴, 경제적 부정, 정치적 부패, 교육의 타락, 환경파괴 그리고 도시의 비인간화 등 여러 형태의 "강도 만난 자"--실직자, 장애자, 여성, 아동, 노숙자 그리고 노인 등--를 도울 수 있다. 소수의 잘 뭉쳐진 기독 시민은 종종 오만한 정치영역과 경제영역이라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물맷돌이 될 수 있다.
민종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육위원장, 기독교학문연구소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