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행 15: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행 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은 갈수록 사람들이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빠져서 남을 관용하고, 배려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평소 친밀하고 사랑했던 관계도 논쟁하고 다투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두 세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참석하게 되면 논쟁에 휘말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관용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요구됩니다. 그래야만 공동체가 평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1. 교회의 본질
교회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며, 교회가 위치한 곳은 엄연한 현실 세계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교회가 하나 됨을 외치지만 어느 공동체보다 하나가 되기 어려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세상 공동체는 나름대로 모이게 하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혈연이 같은 가정, 이익을 추구하는 직장, 명문을 추구하는 사회, 책임을 강조하는 국가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모이면 갈등과 분쟁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만 혈연도 제각기 다르고, 이윤이나 명분을 추구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니고, 책임이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든지, 교회가 어느 지역이나 나라에 존재하든지 지상에 모든 교회는 다 하나로 네트워크 되어 모두 다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회가 세상에 어떤 공동체보다 사랑을 가르치고, 노래하고,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 결과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고, 살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면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1)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고, 사람들을 위해서 모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 남을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배려하고, 관용하고, 희생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르치고 나누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 이기적이고 갈대와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성령께서 그 마음을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물론 오늘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다른 공동체와 전혀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더 실리와 명분을 앞세우는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곳은 교회가 아닐까요? 그러한 교회를 버리고 떠나 좀도 좋은 교회를 찾아야 할까요? 과연 이상적인 교회가 지상에 어디 있을까요? 왜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묶여진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실망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는 본래의 주님이 기대하신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라고 하지만 본질에서 벗어난 변질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처음에 세우신 교회는 근본 원리와 본질에 충실했었던 교회요, 누구든지 교회에 와서 세상 공동체에서 맛보지 못한 사랑을 경험하고 교회를 높이 평가했던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기서 칭송이라는 말은 은혜, 선물, 기쁨, 감사를 뜻으로 한두 번이 아니라 세인들이 계속적으로 호감을 가지는 교회였으며, 또 하나의 칭송은 찬양하다, 웅장하다, 크게 보이다 라는 뜻으로 미완료 상태로 세인들이 교회를 지속적으로 존귀하게 보는 모습입니다. 지상교회의 모체인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2. 사단의 시험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화목하고 평안하고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영적인 존재로 무신론이나 유물론을 앞세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를 이미 장악하여 시도 때도 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시험과 유혹과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 사단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넘어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범죄케 하여 멸망하게 하고,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제자들이 배신하도록 만들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상 교회가운데 어느 교회도 예외가 없음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단의 시험에 빠져 구제 문제로 분쟁하고, 유대교의 핍박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교회에 침투하여 거짓 진리를 퍼뜨리고 각종 혼란과 분열에 빠뜨렸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들이 사단의 시험에 빠져 분쟁과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좋은 전통을 복제하고 최초로 이방선교에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는 무사하였을까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시험과 유혹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행 1:8에 말씀하신 ‘땅 끝 복음화’의 비전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기폭제 역할을 하는 안디옥 교회가 아름답게 부흥, 성장하는 것을 시기한 사단이 안디옥 교회에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특별한 은총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일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기독교를 가장한 사단의 세력이 안디옥 교회의 침투하여 안디옥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일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출발이 구약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구약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만을 고집하고 신약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를 변절하거나, 변질시켰다고 오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타종교보다 더 배타적이 되면서 온갖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기독교 내부에 그와 같은 유대교의 잔재를 완전히 씻어 버리지 못한 절충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으로 안디옥교회를 비운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공격한 일입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능히 라는 말은 구원의 절대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처럼,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지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와 같은 할례주의자들은 후일에 바울이 세운 다른 교회들까지 파고들어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을 계속했음을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러나 알고 보면 그 같은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 할례가 절대 조건이 되고 믿음은 부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논리이며 결국 복음을 약화시키거나 무력하게 만드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율법이 너무나 형식화 되어 육신의 할례만 중요하게 여기고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같은 유대인들의 주장에 상당수가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며 반발하고 논쟁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행 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여기서 다툼과 변론이라는 말은 대중이 봉기할 때 쓰는 말로 폭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뜻합니다. 변론은 다른 사람의 말꼬리를 잡고 계속 공격을 하는 논쟁을 뜻합니다. 왜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사단이 배후에서 그런 사람들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왜 그와 같은 이단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안디옥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할 것이라는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연조가 짧고 신학적인 깊이가 없던 안디옥 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주장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을 가르쳤고, 신뢰를 주었던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를 믿을 것인가? 하는 양자 선택에 있어서 이단 쪽으로 기울어질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만일에 안디옥 교회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교회는 분열의 상처를 피할 길이 없는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디옥교회만 아니라 그동안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하여 세운 모든 이방 교회들도 똑같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불행한 사태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3. 화합하는 교회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시험 유혹 핍박 논쟁을 통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입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1950년 고신측과,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1954년 기장측과, 셋째로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1959년 장신측과, 넷째 교권대립으로 인한 1979년 방배동측과의 분열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만일 한국 장로교회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요즘처럼 전도와 선교와 대사회와 대정부를 상대하는 일에 화합을 하였다면 한국 기독교는 민족과 세계 속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위상이 높아져 민족 복음화가 더 앞당겨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진리라는 독선을 내세워 끝없는 분열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원수처럼 분쟁과 대립과 법정 소송의 추태를 불신자들 앞에서 자행하므로 기독교가 주장해온 사랑은 무력화되었고 기독교가 사랑과 관용이 아니라 분쟁의 상징처럼 지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교단만이 아니라 교회들마다 교인들 간에 내부적으로 크고 작은 분쟁과 분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니 교인들의 가정에서도 화목이 사라지고 불화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기독교는 사단이 의도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 위상이 실추되고, 세인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 결과 전도가 먹혀들지 않는 무력한 교회, 성장이 멈춘 고목나무 같은 교회, 생명력을 상실한 박물관 같은 교회로 전락될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정과 교회와 교단과 기독교회가 더 이상의 분쟁과 분열을 반복하지 말고 화합과 평화를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 교회가 바로 오늘 성경에 안디옥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변질이 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본문의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1) 내부 분쟁의 중단
인간들이 모인 곳은 교회일지라도 논쟁과 분열의 가능성이 항상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습니다.
지상 교회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예루살렘교회도, 선교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안디옥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분열의 문제는 사도들이 무엇보다 교회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역할과 책임을 나눔으로 위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분열의 위기를 극복했을까요? 그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양측이 공감하고 논쟁을 일단 접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제 삼자인 예루살렘 교회의 중재를 받기로 결의하고 무조건 논쟁을 중단한 일입니다.
(행 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를 막론하고 이해가 걸린 양자 간의 논쟁은 문제를 더욱 악화 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대화도 좋지만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삼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일에 후회할 일이 적어집니다.
2) 예루살렘의 결정
안디옥 교회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 상소하였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해법을 의논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영향력이 큰 베드로가 과거 하나님이 자기를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때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재한 사실을 상기 시키며 이방인에게는 할례가 필요 없음을 역설하였습니다.
(행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열띤 토론과 회의를 거듭한 끝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원칙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보다 더 성경적이며, 과연 성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행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정을 내린 당사자가 성령과 우리라고 한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앞세워 결정을 내렸습니다.
3) 기쁨으로 순종
어느 누구나 이해관계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벌리던 사람들에게는 솔로몬의 재판일지라도 양쪽이 다 만족하고 승복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예루살렘 교회가 종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공식적인 결정 사항에 이의를 걸지 않고 기쁘게 승복하였습니다.
(행 15: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행 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회는 교회 분열의 위기를 위로와 기쁨의 기회로 역전시킴으로 사단의 시험과 도전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안디옥 교회만 아니라 전 기독교를 분열시키려는 사단의 공작은 실패로 돌아가게 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한 사단은 오늘도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국가를 항상 분쟁과 분열에 휘말리도록 시험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다툰다고 할지라도 분쟁하고 분열하는 것은 성령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기를 힘쓰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늘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도 처음에는 진리 문제를 가지고 심히 다툴 정도로 추호도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을 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분열로 끝나지 않고 화합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누구든지 자기 주관과 판단과 주장만이 최선이라는 아집을 버리고, 2) 다른 사람의 주장을 경청하고 좋은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하고, 3)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4) 매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5) 주님이 세운 공회의 결정에 대해 겸손히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에서 그와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면 사단의 어떤 도전에 앞에서도 분열이 아니라 더욱 화합하고 하나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