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07-01-26 12:27:13

현대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흡영 교수(강남대학교 조직신학)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며, ‘신학’은 신앙의 빛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유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적 근대주의가 대두된 이래 많은 이들이 신앙상의 위기를 겪어 왔다. 이러한 상황은 신학의 존립 자체까지도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이후의 사조가 파괴하고 무너뜨렸던 것들을 재통합하고 결합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더구나 우리는 과학 기술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은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신의 경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대 과학과 대화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이제 한국교회와 신앙인의 삶을 위하여 필수적인 과제로 등장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교회의 현실은 여기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황우석 사건 당시 한국교회는 무슨 역할을 했던가?). 그래서 필자는 무엇보다 양자의 관계를 종합적이고 균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분야의 선구자인 이안 바버(Ian Barbour)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네 가지 유형―충돌, 독립, 대화, 통합―으로 구분한다. 이 유형론은 많은 것을 압축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시대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는 이 시대 교회들의 현실적인 과제인 신학과 과학간의 담론을 이해하고,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는 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충돌(Conflict) 유형
이 유형은 과학과 종교간에 마치 전쟁과 같은 양상이 전개되는 경우이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논쟁, 다윈의 진화론 논쟁 등에서 그 역사적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 배타적 입장에는 더욱 문제가 되는 태도들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자연과학의 경우 과학적 유물주의(scientific materialism)이고, 신학의 경우 성서적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이다. 양자는 현대 과학과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다고 전제하고, 둘 중 하나만을 진리로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1) 과학적 유물주의
과학적 유물주의의 배후에는 ‘과학적 방법이 앎에 이르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이라는 명제와 ‘물질이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실재’라는 명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인식론적 환원주의 또는 물질적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과학만이 객관적, 개방적, 보편적, 개혁적이며, 그에 비해 종교 전통은 주관적, 배타적, 지역적, 보수적이라 혹평한다. <우주>라는 TV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자크 모노(Jacques Monod) 그리고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등이 이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 과학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고 있다. 과학이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답하려 한다면, 신학은 ‘왜(why)’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서로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 더구나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등 현대 과학 자체가 이러한 환원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신에 대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과 대립되는 것은 사실상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물질적 환원주의이다.

2) 성서적 문자주의
성서적 문자주의는 과학적 유물주의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적 태도이다. 이를 다시 ‘교권적 권위주의’와 ‘과학적 창조주의(scientific creationism)’로 구분할 수 있다. 교권적 권위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이전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교회의 권위가 자연과학에 우선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특히 제1차 바티칸회의는 과학 및 근대화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고, 교회 전통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교황무오설을 교리화하였다. 과학적 창조주의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이라고도 칭하며, 성서문자주의적 근본주의가 그 근원이다. 성서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를 동일한 영역에 놓고, 양쪽의 주장이 대립할 때 항상 과학 이론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성서의 문자적 진술에 과학을 끼워 맞추고 있는 셈이다. 일반 과학자들은 이들을 반(反)과학적이라고 평가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과학적이라 자처한다. 바버는 “창조과학이 종교적 자유와 과학적 자유를 동시에 침해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들이 보여 주는 근본주의의 원인은 파편화되고 전문화된 고등 교육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한국교회의 현실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전쟁, 절대 빈곤, 경제 발전, IMF 사태 등 반세기 동안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항상 불안하기만 했던 한국인들에게, 절대적 힘을 소유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설교하는 근본주의는 분명히 매혹적일 것이다. 교육 제도 또한 ‘창의적 사고력 함양’과 진정한 인간됨을 지향하는 ‘전인교육’보다는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암기 위주의 전문인 양성에만 치중해 온 점이 이러한 근본주의를 더욱 만연케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주체적 가치보다는 환경에 순응했던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근본주의와 같은 종교적 이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시대착오적인 교리로 한국인들의 주체적 가치가 상실되게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현실적 상황의 상관관계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유와 행동 능력, 지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Independence) 유형
이 유형은 신학과 과학이 서로 분리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이라 보는 입장이다. 각자는 독자적 영역과 고유한 학문의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간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각자의 성격과 개성을 존중하려는 태도이다. 신학과 과학은 서로 대조적인 연구 방법을 가지고 있고, 삶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언어들이라고 주장한다.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학, 실존주의 철학, 언어분석철학 등이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신정통주의에 의하면 신학은 하나님과 관련된 학문 분야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와 믿음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Karl Barth).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것이지, 과학을 통하여서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영역은 과학이 아닌 역사이다. 과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관측과 실험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실존주의는 신학과 과학을 인격적 주체와 비인격적 객체간의 독립적인 두 영역으로 간주한다. 신학은 신앙인의 주체적 참여로 인식되지만, 과학은 연구 대상과 객관적으로 분리된 관찰에서 시작된다. 과학자는 연구 대상과 ‘나와 그것의 관계(I-It)’ 안에서 분석적으로 만나지만, 신앙인은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I-Thou)’ 안에서 인격적, 직접적으로 만난다. 언어분석철학은 상이한 언어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위해 사용되며, 어느 한 쪽으로 환언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과학이 모든 담론의 규범이 되어야 하고 실험적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해 버리는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한 전면적 반론이다. 과학과 종교는 전혀 상이한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한 쪽의 기준으로 다른 쪽을 비판할 수 없다. 과학적 언어의 기능은 자연 현상에 대한 문제들로 제한되는 반면, 종합적 세계관, 삶의 철학, 윤리적 규범에 대한 사항들은 종교의 언어 기능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입장들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신과 세상을 지나치게 이원화하고,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만 편중되어 창조론과 성령론이 취약하다. 과학은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이며, 신학은 인격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실존주의의 대비는 과장된 것이다. 과학에서도 과학자의 개인적 판단이 필요하며, 이성에 의한 합리성도 신학의 구성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적 분리는 종교와 과학의 명확한 구분을 위해 도움은 되지만, 종교도 실천 행위뿐 아니라 명제적 성격을 가진 교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기에 독립 유형은 신학과 과학간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반면, 양자간의 건설적 대화와 상호보완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단점을 보인다.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입장은 충분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신앙과 과학 기술은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된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

대화(Dialogue) 유형
이 유형은 신학과 과학이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독립 모형과 통합 모형의 중간적인 입장으로 다소 모호한 점이 있지만,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이 유형을 지지한다. 우선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신학도 교리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방법론적 유사성도 한계가 있다. 과학은 주어진 조건과 원인에만 국한하여 연구할 수 있으나, 신학은 종말과 같이 예측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쏟으며 미래를 향한 개방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 맥물린(Ernan McMullin)은 신학과 과학을 계층적으로 구분한다.

신학은 일차적 원인인 신에 대한 학문이고, 과학은 이차적 원인에 대한 학문이다. 양자간의 논리적 연결성은 없지만, 전혀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서로 ‘공명(consonance)’하는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피터스(Ted Peters)는 이 용어를 채택하여 이러한 입장을 ‘가설적 공명(hypothetical consonance)’이라고 명명한다. 공명은 궁극적으로 일치(accord)와 조화(harmony)를 의미한다. 피터스는 이 일치와 조화가, 아직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신학과 과학이 추구하는 목적이라 주장한다. 현대의 빅뱅우주론과 양자이론 등이 이미 초월적 실재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신에 대한 질문이 과학적 합리성의 내부로부터 진솔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자와 과학자들은 이미 동일한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더욱이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이고, 종교는 주관적이라는 철학적 구분 자체가 이미 붕괴되고 있다. 사실상 과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만큼 객관적이지 않고, 종교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만큼 주관적이지도 않다. 과학도 신학과 같이 이론 의존적(theory-laden)이지, 이론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쿤(Thomas Kuhn)은 그의 유명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이론과 데이터도 과학 공동체에서 주도되는 패러다임(paradigm)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신학에도 이 패러다임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으며, 신앙 전통도 동일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앙 경험과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신학은 과학보다 더욱 패러다임 의존적이다.

통합(Integration) 유형
이 마지막 유형에 속한 학자들은 신학의 내용과 과학의 내용을 서로 통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화 유형의 경우는 주로 방법론적인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반해, 이 유형은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서로 직접적인 대화와 수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바버는 이 유형을 ‘자연신학’과 ‘자연의 신학’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익혀 둘 필요가 있다.

1)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이 입장은 토마스(Thomas Aquinas)의 신학 전통을 계승한 가톨릭의 자연신학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토마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을 전개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세상 만물이 ‘우연적 존재’들이고, 따라서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 존재’로서 제1원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후자는 질서와 예지성이 일반적으로 자연에 내재하고, 개별적 자연 현상에서도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므로, 모든 것이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설계(design)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예지적 설계에 대한 논쟁의 대표적인 현대적 우주관이 바로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이다. 현대 천체물리학은 우주 초기에 물리학적 상수나 조건이 조금만 차이가 났더라도, 이 우주에서 생명의 존재는 불가능했음을 밝혀내고, 이 우주는 마치 생명이 존재 가능하도록 미세 조정된 것처럼 보인다고 관측한다. 무신론자 호킹(Stephen Hawking)은 “만약 빅뱅이 일어난 일 초 후에 팽창 속도가 10의 16승 분의 1보다 작았더라면, 이 우주는 지금 현재의 크기에 도달하기도 전에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신학은 오늘날 같이 문화적이고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계에서 용이하게 합일성을 도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더욱이 설계자(Designer)에 대한 사상은 종교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Intelligent Design 논쟁 참조). 그러나 자연신학은 성서의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결단하는 신앙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하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자연신학에 의해 신의 존재는 입증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관념적 증명일 뿐, 교회 안에서의 실제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있다.

2)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자연신학과 달리 ‘자연의 신학’은 과학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신앙경험과 역사적 계시를 근거로 하는 ‘신앙’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과학과 신학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평행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심이 겹쳐 수렴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창조론, 섭리론, 인간론이 현대 과학의 발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하나님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신학을 재구성하게 만든다.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자연은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과 법칙이 어우러져 성취한 역동적 진화의 과정이다. 자연적 질서는 생태학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다층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신과 인간과 생물간의 관계에 대해 재조망하게 하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큰 영향을 준다.

생물학자이며 신학자인 피콕(Arthur Peacock)은, 하나님은 과학이 밝혀내는 자연 세계의 과정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법칙과 우연의 종합적 과정을 통하여 세상을 총체적으로 창조하시지, 그 과정 사이의 틈(gap)에 끼어 들어 중재하는 부분적 존재가 아니다. 바버는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의 신학을 이 입장에 포함시킨다. 샤르뎅은 계속적 창조론과 미완성의 세계 안에 내재한 신론을 주장했다. 만물의 최종 수렴점인 오메가 포인트에 대한 그의 통찰은, 진화론과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어우러져 창의적 해석을 성취한 통합 유형의 한 실례이다.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지구촌에서 자연의 신학은 강력한 윤리적 특성을 가진 환경신학과 생태신학을 촉구하고 있다. 환경론자들은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의 사상적 근원이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신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내재성을 축소해 버리고, 인간을 다른 생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과도하게 구별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래서 자연의 신학자들은 강력한 환경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성서를 재해석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과 신학간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고전적인 바버의 유형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모든 유형론이 그러하듯이 바버의 유형론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충돌 유형과 독립유형은 비교적 명확하나, 대화 유형과 통합 유형은 다소 구분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주제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유형론은 우리에게 신학적 입장을 결정하도록 돕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이러한 주제들을 너무도 생소한 담론으로 취급한다.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그저 한 순간의 호기심 정도로 지나칠 때가 많다. 그래서 2006년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초유의 ‘과학 스캔들’(황우석)도 이미 까마득한 기억의 전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이래서야 현대과학의 심각한 도전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신학은 단지 교회 내적인 종교적 담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우주의 영역에서 다른 학문, 특히 과학과의 진솔하고 의미 깊은 대화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을 올바르게 섬겨 나가야 할 너무도 귀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우리가 갈수록 첨단화되는 과학 시대에 사는 한, 그리고 그 과학 기술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리 자신, 우리네 삶을 규정하고 영향을 주는 한, 우리는 이 사명을 외면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자명하다. 지난 날 신앙의 선조들이 그래왔듯이, 시대의 도전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삶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의 생명력을 키워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상에서는 현대과학도 더 이상 신학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성실한 파트너가 되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며, 함께 인류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결단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월간프리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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